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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벤에셀 Apr 02. 2021

빛과 어둠이 함께일 때만 보이는 그림자처럼

모든 순간 그림자와 함께였다

유독 마음이 어둡게 그늘진 날,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내겐 그림자가 그중 하나이다.


그림자는 빛만 있는 환한 곳에서도 보이지 않고 빛 하나 없이 어둡기만 한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희미한 빛과 진한 어둠이 공존할 때만 그림자는 내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에게 그림자는 성찰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아주 약간의 에너지만을 가지고 있었을 때 나는 마음이 밝을 때는 그 환한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어서, 마음이 너무 어두웠을 때는 들여다 볼 힘이 없어서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 솔직한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매일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지만 막상 내가 내 그림자를 가만히 응시하게 될 때는 그렇게 많지 않아서, 나는 이따금 마주하게 된 내 그림자에 반가움과 아릿함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그림자에는 어떠한 표정도 담겨있지 않다.


그림자는 웃고 있지도, 울고 있지도 않다.

그렇게 텅 비어 있는 그림자의 모습이 나와 가장 닮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림자는 항상 내 내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나를 닮은 내 그림자에 시선이 가게 될 때, 여전히 내 뒤에 나만의 그림자가 있다는 것에 이상한 안심을 느끼곤 했다.


어색한 표정도, 인위적인 보정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담아낸 것 같은 그림자를 바라볼 때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림자는 내가 만들어낸 것 중 가장 어두운 나의 모습이면서 또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내 그림자가 좋다.


온통 어둠뿐인 것 같은 순간에도 묵묵히 내 뒤를 받쳐주고 있는 그림자가 든든할 때가 있다.


문득 혼자인 것 같은 순간들에,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유일하게 지켜보며 언제나 늘 같은 모습으로 나를 따라와 줄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 의지가 된다.


영영 나이 들지 않는 모습으로 조금씩 나이 들어갈 나를 뒤따라올 나만의 그림자.

영영 나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림자는 마음과도 퍽 닮아있다.


시원한 2020년의 가을밤,

찬이와 함께 나온 저녁 산책길에서 나는 우리의 그림자 사진을 남겨놓는다. 영영 나이 들지 않을 우리의 마음처럼 우리의 그림자도 나이들지 않은 채 항상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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