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낀 이끼를 가만히 바라보며
누구에게나 한 번씩 찾아오는 우울감은 마치 나무에 낀 이끼와도 같은 것 같다.
아이들하고 산책을 할 때면 산책길에 놓여있는 수많은 나무들을 보게 된다. 유독 비가 잦았던 올해, 나무에는 연둣빛 이끼들이 잔뜩 묻어져 있다. 코로나와 태풍이 할퀴고 간 우리들의 시간처럼 나무들에도 그 아픈 시간의 흔적들이 색칠되어 있는 것 같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찬이네 집으로 가던 길에 나는 연둣빛 이끼가 잔뜩 껴 있는 커다란 나무 하나를 보게 됐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그 나무를 지나칠 때면 그 나무보다도 그 나무에 묻어져 있는 이끼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곤 했다.
‘언제쯤 저 나무에 묻어져 있는 이끼가 옅어질까?’
‘다음 주에 올 때 쯤에는 저 이끼가 지금보다 옅어져 있을까?’
나무를 잔뜩 연두색으로 색칠해 놓은 저 이끼가 언제쯤 옅어질지 궁금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나무에는 여전히 이끼가 묻어져 있다.
내 안에 껴 있는 우울감이 꼭 저 이끼와 닮아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독 내 마음이 흐렸던 날 갑작스레 나를 찾아왔던 연둣빛 우울감이 저 나무에 오래도록 묻어있는 이끼처럼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흐린 날은 언젠가 저물게 되고 맑은 날이 다시 찾아오면 나무에 색칠되어 있는 저 이끼도 이내 곧 옅어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내 마음에 껴 있는 우울감도 언젠가는 옅어질 그 무언가라는 것도.
그저 나무도, 나도 잠시 이 흐린 시간 속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이끼로 뒤덮여 있는 시간이 수백년의 시간을 그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온 나무를 이뤄온 시간의 일부이듯, 이끼로 뒤덮인 마음을 안고 보내는 이 흐린 시간도 결국엔 나를 이루어갈 수많은 시간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끼가 가득 묻어 있어 나무 기둥이 연둣빛으로 물들어있는 나무가 ‘나무’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나무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 모습 역시 나무의 다양한 모습 중 한 모습이다. 그리고 자주 나타나지는 않는 그 모습은 나무에게 보통날과는 다른 색다른 느낌을 가져다주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해준다.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끼로 색칠되어 있는 연둣빛 나무는 보통의 나무를 바라보았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들을 느끼게 해 준다. 그 감정들은 사람에 따라 ‘낯섦’일 수도 있고, ‘센치함’일 수도 있고, 그 누군가에겐 ‘설렘’일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엔 그 모든 게 한 데 모여 다시 평범한 일상의 한 풍경이 되어준다.
지금 우울이란 감정으로 색칠되어 있는 나도 보통날의 나를 담아낸 일반적인 나의 모습은 아니지만, 이 모습 역시 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러니 어느 날 내린 비에 갑자기 찾아온 이끼와 같은 우울을 빨리 떠나보내야 할 불청객으로 여기며 ‘언제 나를 떠나갈까’ 하는 마음으로 이 시기를 불안하게 보내기 보다는, 그냥 잠시 나의 한 순간에 머물게 된 뜻밖의 방문객이라고 생각하며 잘 머물다 갈 수 있게 살펴준다면 우울이라는 감정을 조금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굳이 내가 재촉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스스로 알아서 떠날 그런 방문객을 대하듯이.
한 순간에 나를 잠식해버릴 것만 같은 이 우울감도 그저 나를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색칠하고 있는 잠시 머물다 갈 이끼일 뿐이다. 그래서 무리하여 내 안의 우울을 걷어내려 하지는 않으려 한다. 나무에 낀 이끼를 손톱으로 긁어낸다고 해서 이끼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이끼를 긁어내려다가 나무에 상처를 입히게 되기도 하니까.
무엇이든 때가 되면 옅어진다. 나무에 낀 이끼도, 내 마음에 낀 이끼도 언젠가는 조금씩 옅어지다 어느 날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을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려 한다. 불쑥 찾아온 우울이 언제 떠날까 걱정하기보다 내게 머물러 있는 동안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것이 더 좋은 채색이 되어줄 것 같다.
그렇게 채색되어 가는 시간은 나라는 사람을 보다 다양한 색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흐린 시기라고 해서 이 시간이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야 될 시간은 또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흐렸던 이 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