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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벤에셀 Apr 02. 2021

휴지에게 좋은 휴먼일 수 있도록

휴지 하고 싶은 말 다해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타인이기 이전에 그 무엇보다 우선적인 ‘나’로 존재한다.

누구나 ‘나’로 먼저 존재한 이후에야 기꺼이 다른 누군가에게 타인이 되어준다.


그런데 가끔 자기보다 나를 우선해주는 것 같은 존재를 만나게 되는 때가 있다. 나에게는 휴지가 그런 존재였다.


나는 원래 강아지를 무서워한다. 여전히 휴지가 아닌 다른 강아지들은 무섭다. 그런 내가 처음 본 내 앞에서 그 어떤 경계감도 없이 배를 까며 나에게 다가와주었던 휴지에게만큼은 경계를 거둘 수 있었다.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휴지가 내 손을 핥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휴지는 다른 강아지들처럼 많이 짖는다. 특히 밤이면 유난히 많이 짖는다. 그럴 때면 나를 포함한 휴지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휴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휴지야 시끄러워! 좀 조용히 좀 해!”


그날도 똑같은 날이었다. 어김없이 휴지는 늦은 저녁 시간에 시끄럽게 짖었고 찬이와 욱이, 이모와 이모부, 나와 할머니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휴지에게 언제나처럼 “휴지야 좀 조용히 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날 잠에 들기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휴지는 우리 때문에 시끄러웠던 적이 없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끊임없이 소리를 내어 말을 한다. 때론 티비도 엄청 크게 틀어 놓고, 아주 시끄럽게 큰 소리를 내며 말을 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휴지도 시끄럽지 않았을까?


졸린 휴지가 조용히 잠을 자려던 순간에도, 가만히 밥을 먹으려던 순간에도 우리는 휴지가 자건, 밥을 먹건 상관없이 우리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각자의 할 말들을 잔뜩 쏟아냈었다. 한 번도 우리의, 나의 말소리가 휴지에게도 거슬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다.


휴지는 우리가 휴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다. 어쩌면 휴지 역시 우리에게 조용히 좀 해달라는 말을 전했을지도 모른다. 무심한 우리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


우리에게 휴지의 말은 너무도 쉽게 그저 시끄러운 소음으로만 여겨졌다. 무수히 많은 순간 휴지도 우리 때문에 많이 시끄러웠을 텐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만 휴지 때문에 시끄러운 줄 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그동안 우리가 내었던 그 많은 소음들을 견뎌 주었던 휴지에게 또다시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정작 조용히 해야 할 것들은 우리들인데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휴지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나의 이런 무감각함이 부끄러웠다. 무심함도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잠 들기 전에 홀로 휴지에게 약속 하나를 했다. 앞으로는 절대 너에게 시끄럽다는, 조용히 하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많은 시간 나의 소란스러움을 묵묵히 견뎌준 고마운 너에게, 늘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 소중한 너에게 나도 예의를 지키겠다고.


너무 뒤늦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어 휴지에게 미안하고 염치가 없었지만, 그날 밤 나는 휴지에게 좋은 휴먼이, 좋은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람이 아닌 존재와 친구가 되어가는 법을 그렇게 조금씩 배워간다. 서툴수록 더 많이 노력해야한다. 나와 많이 다른 존재일수록 그와 가까워지고 친해지기 위해서는 그를 더 잘 이해하고 살필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이 필요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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