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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벤에셀 Apr 02. 2021

생동감 없는 시간 속 피어난 생기

첫 눈이 오던 날,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였다

시간이라는 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동감’이라는 것이 사라졌던 거짓말 같은 한 해가 2020년이었던 것 같다. 시간은 분명 흐르고 하루는 지나가고 있는데 모든 것은 멈춰져 있는 상황 속에서 2020년은 그 시작을 체감하기도 전에 끝이 나버렸다.


시간은 작년과 같은 속도로 흘렀을 텐데 흐르고 있는 중에도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그리고 분명 멈춰 있는 시간이었는데 또 유독 너무 빨리 흘러간 것 같다고 느낀 이유는 시간을 체감할 순간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한 해의 시간에 대한 감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건 분명 예사일이 아니다. 물론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겐 2020년이 썩 나쁜 한 해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만, 2020년을 지나온 사람들에게 2020년의 시간에 대한 공통적인 감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억에 남겨 두고 간직할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체험하지 못한 채, 그저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간을 대했다. 그렇게 2020년의 시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들을 마음 껏 경험하고 느끼며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저 어서 빠르게 지나가야만 하는, 경우에 따라서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을 수도 있었기에 시간에서 생동감이 사라졌다.


시간의 주도권을 뺏긴 것이다. 그렇게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무감각해졌다.


하지만 그런 생동감 없는 시간 속에서도 환하게 피어나는 생기가 있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눈이 펑펑 왔을 때 아이들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러 오랜만에 집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일년 동안 아이들을 보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이지만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신난 얼굴로 나가는 아이들의 뒷 모습을 보며 ‘정말 얼마나 답답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제 얼굴보다 더 큰 마스크를 쓰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볼 때면 ‘코로나가 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왜 쓰는지도 모르는 마스크를 1년 내내 쓰며 보냈던 이 시간은 어떻게 기억이 될까’ 항상 걱정이 됐다.


놀이터에는 이미 많은 어린이들이 나와있었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입가에 띄고 있을 미소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일하게 보여지는 눈이 생기로 반짝반짝 빛나며 환하게 웃고 있는 걸 보니 마스크 아래의 입도 크게 미소짓고 있을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부모님과 함께 가오나시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도 있었고 올라프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도 있었다. 이렇게 눈이 펑펑 온 게 올 해 들어 처음이라 다들 너무 신이 나 보였다. 참 많은 것이 유예되었던 시간이었지만 신나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에게는 더 많은 것들이 미루어지기만 했던 한 해 였구나 싶었다.


찬이와 욱이도 장갑과 신발, 옷이 다 젖을 정도로 큰 눈덩이를 굴려와 각자 자기만의 눈사람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옷은 다 젖고 땀 때문에 얼굴은 새빨개졌지만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였다.


찬이와 욱이는 제 몸 만한 눈덩이를 굴려가며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만든 첫 눈사람이 완성됐다. 뉴트리버를 닮은 다소 엽기적인 눈사람을 마주하자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당황을 하더니 내가 ‘뉴트리버 닮았다’라는 말을 하자마자 빵 터지며 다시 그 옆에다 새로운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날 아이들은 점심을 먹으러 잠깐 들어가자는 내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점심도 거르며 하루 종일 새로운 눈사람을 만들었다. 오랜만에 진이 빠지도록 놀았던 아이들은 그날 밤 오랜만에 해야 할 일을 이대로 제대로 한 사람들처럼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열심히 땀 흘려가며 눈사람을 만들던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잊혀지지 않을 2020년의 첫 눈이 오던 날 하얗게 펑펑 쌓인 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아이들의 미소, 오랜만에 만들어보는 눈사람에 들떠 반짝이던 아이들의 눈빛, 빨갛게 열이 달아오른 얼굴, 눈에 다 젖은 옷들, 아이들의 그 모든 모습들이 내게는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는 눈이 내린 것보다, 눈사람을 만든 것보다 첫 눈에 설레어하며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던 아이들을 바라보았던 시간이 더 설레었다.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아이들의 그 맑은 모습을 통해 나는 올 해 들어 처음으로 생동감이라는 것을 느껴보았다.


P.S 찬이, 욱이

집콕 생활만 하다가 올해 들어 처음으로 눈이 펑펑 왔으니 더욱 신이 났겠지.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뉴트리버 눈사람, 그 눈사람은 잊어도 돼. 그런데 그 눈사람을 만들 때 너희들 얼굴에 피어났던 그 미소와 생기는 잊지 말고 꼭 간직했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금보다 더 많이 흘러서 혹시 잊게 되더라도 다시 꼭 기억해줘. 너희가 그렇게 예쁘게 웃던 아이였다는 것을. 펑펑 내린 눈만으로도 참 많이 행복해하던 아이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예쁜 아이는 여전히 너희들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는 것을. 어른이 된 너희들의 시간에 그 언젠가 다시 눈이 내렸을 때, 너희들이 그때처럼 펑펑 내리는 눈에 기분 좋게 웃어 보일 수 있는 어른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들을 위해서. 내 겨울을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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