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읽고, 시를 쓰며 사춘기 아이와 함께 하기
파도
-서로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지었다
참 열심히도 지었다
그런데 웬걸!
쳐르르르,
파도가 밀려 들어와
까르르르,
시원하게 쓸고 가더니
모래성은 온 데 없고
오물조물 작은 생명체들이
나타났다!
반짝반짝, 소란스런
예쁘고 작은 이들 덕에
바닷가는 눈부시게 빛났다
이젠
파도가
무섭지 않다
내 아이에게도 드디어 찾아온 것 같다. 사춘기 말이다. 근래 들어 "싫어요", "왜요?", "내가 알아서 해요" 3종 세트를 끊임없이 시전 중이다. "싫어요"말고 뭐라 해야 하냐는 말대꾸를 몇 번 들었고, 감정-욕구 목록 벽보를 사다가 집에 붙이게 되었다. 그동안 워낙 자기표현이 명료하고 확실한 아이였던지라 나와 아이도 이걸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이 감당하기 못할 만큼 큰 감정과 생각, 신체적 감각이나 느낌들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덮쳤다가 빠져나갔다가 하느라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면서 사람들이 왜 생각이나 감정을 파도라고 부르는지 제대로 깨달아가고 있다.
하지만 놀라운 일들도 많다.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후의 아이는 눈빛이 좀 다르게 반짝인달까. 대화 내용도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누가 이랬고, 선생님이 이랬고, 급식이 어땠고, 요즘 뭐가 유행이고, 학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등등 일상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걸 묻는다: 엄마, 전생이 있어요? 내 전생은 뭐였을 거 같아요? 세상은 왜 불공평해요? 엄마는 신이 있다고 생각해요? 학교는 남녀차별이 너무 심해요. 그냥 즐겁게만 살면 왜 안되죠? 학교와 어른들은 왜 이렇게 쓸 데 없는 걸 하루종일 앉혀 놓고 가르치는 거예요? 센터 선생님들은 왜 이렇게 착하세요? 그분들은 어떻게 먹고 살아요?
외모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아이는 특히, 코에 관심이 많다. 어디서 들었는지 코팩을 사달라고 하더니 열심히 코팩을 하기도 하고, 코에 모공이 있는 게 너무 신경쓰인다며 어떻게 모공을 없애게 할 수 있냐는 질문을 하며 열심히 거울을 본다. 유독 코에 온 데 관심이 다 가 있다. 일주일도 안 가긴 했지만 근육이 생기고 살이 쪄야 한다며 밤 10시 넘어서 삼겹살 요리를 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야식을 먹으면 살이 찐다며 며칠간 라면을 꼬박꼬박 끓여 먹기도 했다.
한 차례 파도가 휩쓸고 갈 때마다 엄마한테 와서 한바탕 댓거리를 쏟아놓는 아이를 견뎌내 준 후면, 아이의 눈빛은 조금은 더 깊어진 듯 했고, 책상 위에 뭔가가 꼬물꼬물 만들어져 있거나 끄적여져 있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아직은 그래도 여전히 세상 물정이라고는 잘 모르는지라 정말 비현실적이고 엉뚱한 욕구와 생각들을 쏟아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헛웃음을 짓기도 한다.
어제는 밤 늦게까지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영상을 찍을거라며 온갖 소란과 함께 복작거리다가 잠들었다. 문득, 그림책 『파도야, 놀자』가 떠올랐고, 혼자 조용히 책을 꺼내 읽었다. 그리고 위의 시를 적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앞에 두고, 아직 '어른'은 되지 못해 바닷가만 서성이느라 파도를 겪어내야 하는 사춘기 아이. 아이와 함께 그 파도를 겪고 있는 나. 그림책 한 권과 나만의 치유시 한 편 덕분에 다행히 파도가 그렇게 무섭지 않아진 것 같다. 나랑 아이, 달랑 둘 뿐이지만 우린 분명 이 시기를 잘 지나갈 것이다.
파도야, 언제든 올테면 오너라! 기꺼이 흠뻑 맞아 줄테니! 나는 이제 너가 무섭지 않다!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