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
세상에는 두 분류의 사람이 있다. 책을 읽을 때 줄을 긋는 사람, 줄을 긋지 않는 사람.
나는 후자의 사람으로 언제부터인가 책에 밑줄을 긋지 않는다. 확실한 건 그 언제부터 전에는 책에 밑줄을 긋곤 했었다는 것이다. 그 옛날 교과서에도, 소설책에도 그랬다. 필기 실력과 공부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지 않나, 내가 그 축에 속했었다. 그게 교과서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책에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하며 읽던 내가 언제부터, 왜 밑줄을 긋지 않는지 생각해보니 책을 중고로 팔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책을 사는 주체가 부모님이 아니라, 내가 되었을 때. 중고 서점을 알게 되었을 때. 그쯤부터 나는 책에 밑줄을 긋지 않았다. 너무 비루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행에 따라 책을 샀다가 먼지만 가득히 입혀진 책들은 언제나 처치 곤란이었다. 너무 두터운 팬층이 있어 입에 올리기에도 두려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읽어보려 애써도 읽히지 않았고 결국 중고 서점으로 향했다. 또 공감할 수 없고, 잘 읽히지 않는 책들이 분명히 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저자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책이 함의하고 있는 것이 그때는 맞고, 아니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너무나도 틀린다는 것을 알 때 그런 책 또한 내 책장에 함께할 수 없는 책이다.
그렇다고 책을 그저 떠나보내는 것은 아니다. 밑줄을 대신해 내가 책을 남기는 방법은 포스트잇이다. 마음에 드는 구절에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다 읽은 후에는 붙여진 포스트잇을 찾아 노트에 옮겨 적는다. 한 번 더 읽을 땐 좋아하는 구절이 바뀌어서 포스트잇이 옮겨지기도 하고 좋아하는 구절만 읽기 위해 포스트잇을 찾아가기도 한다. 다시 읽을 때 포스트잇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왜 여기에 붙여진 건지 의아해하기도 하며 떼어 다른 장표에 붙이기도 한다. 그렇게 포스트잇을 찾아가는 여정은 꽤 즐겁다.
절약의 이유 때문이든 책을 깨끗하게 읽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 책날개도 쓰지 않는다. 다시 펼쳐도 부풀어짐 없이 판판한 책을 만나는 것이 꽤 신선한 환기가 되기 때문이다. 책날개를 대신하는것은 책갈피다. 한동안 예쁜 책갈피를 찾아쓰기도 했는데, 동시에 여러 책을 읽는 습관때문에 예쁜 책갈피만 고집하기 힘들어 졌다. 책갈피는 카페에서 급하게 마련한 냅킨이 될 때도 있고, 가방에 들어있던 출처 불명의 시향 지가, 혹은 버리지 못한 영수증이 될 때도 있다.
이상. 다독 왕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독서의 철학이 있는 사람, 밑줄을 긋지 않는 사람이 책을 남기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