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울산MBC PD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술부터 모바일 미디어의 시대까지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저널리즘의 형태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저널리즘도 함께 발전한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그 부작용도 만만찮게 있었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은 알 권리다. 역사의 한 순간에는 알 권리가 지켜진 적도 있지만, 박탈당한 경우도 많다.
쿠텐베르크가 금속활자술을 발명한 이후, 미디어는 "책의 시대"였다. 글을 아는 엘리트 위주로 지식과 정보가 전파되었다. 책의 발전이 사회를 변동에 영향을 끼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자본론은 세계를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눠 놓았다. 러시아(구 소련)의 레닌이 그러하였고, 중국의 마오쩌둥이 그러하였다. 소수 엘리트들의 "알 권리"가 충족된 것이다. 이는 "엘리트 저널리즘"이라고 이름 붙히고자 한다. 각 사회가 언어가 다르고, 번역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정보의 전파 속도가 느렸다. 사회가 변동되는 과정은 책을 통해 철학을 갖춘 소수 엘리트가 혁명을 주도하면서 부터였다. 대중은 그들이 외치는 선언을 듣고 움직였다. 사실상 엘리트 저널리즘 하에서 대중의 알 권리는 박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신문의 시대"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이 생겼다. 국가의 형태로 오래 지속되어온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언론 집단의 탄생이다. 시기는 19세기 초~중반 정도로 보고 있다. 이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중 저널리즘"이 시작되었다. 정보의 가공이 전문화된 영역에서는 전달 속도가 빠르고, 비교적 오류의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저널리스트들은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는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져 미 수정헌법 1조에 기록되어 있고, 우리나라도 표현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더 이상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사회가 좌지우지 않았다. 저널리스트들은 주로 권력의 부정에 대한 폭로로 그들의 인지도를 얻어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중들의 "알 권리"가 충족되는 성과가 있었다. 군부 정권은 이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고, 신문을 폐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른바 전두환 정권의 <신문 통폐합>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과거 소수 엘리트가 누렸던 영광을 다시 누리기 위해서는 미디어의 입을 틀어 막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유효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TV, 모바일의 시대"다. 누구나 방송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이른바 "1인 저널리즘"의 탄생이다. 저널리스트들이 가진 언론 권력도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저널리즘의 민주화가 이뤄진 것이다. 민주주의는 항상 시끄럽다. 다수결로 향하는 과정에서는 의견 대립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는 필시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언론 권력을 갖고 있던 신문은 이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다. 팩트체크를 거치지 않은 부정확한 정보와 자극적인 정보가 무분별하게 생산된다고 본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최근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일 것이다. 언론사를 끼지 않고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폭로를 했다. 언론사를 끼지 않아도 정보의 전달 속도가 빠를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고, 저널리스트들은 그저 받아쓰기를 해야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지켜줄 수 있는 편이 없다는 점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저널리즘의 변화는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함께 움직인다. 다만 역사의 한 순간을 살펴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변화 사이의 시간 간격이 점차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형태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에 변화에 익숙해 질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그러나, 변해야만 산다. 변하지 않고서는 미디어 기술 발전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조만간 AI가 기사를 쓰기 시작할 것이고, 5G를 통한 초연결시대를 앞두고 있다. 기술은 빠르게 변하지만, 대중의 "알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저널리즘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