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사람
4월이 시작됨과 동시에 기자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기자로 활동하는 플랫폼만 다섯 곳에, 플랫폼마다 성향도 천차만별이다. 내가 잘 모르는 어려운 내용을 취재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원하는 소재를 찾아 구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제법 만족스럽다. 글을 써서 돈도 벌고, 발굴한 취재 아이템이 고스란히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이달은 내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4월이 되니까 몰두해야 할 것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드문드문 빈칸이 보였던 3월의 스케줄표와는 달리, 4월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들이 채워졌다. 어느 정도 각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도처럼 일이 몰아쳐 빠르게 지쳐 갔다.
사실 일 자체의 과다함이나 힘듦이 직접적인 감정 동요의 원인이 되진 않는다. 대신 평소라면 너그러이 넘어갈 만한 것에 유독 더 날카롭게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별것도 아닌데 예민해지고, 겉으로는 티 내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쑥덕쑥덕… 쉽게 말해서 급격히 쪼잔해진다고나 할까.
사람은 어떨 때 화를 내는가? 이 사람을 화나게 는 포인트는 무엇일까?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 있다. 스스로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지인과의 대화를 통해 나를 분노케 하는 기준을 ‘믿었던 사람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항상 누군가와 대화할 때마다 믿음의 상실이 이야기 소재로 나오면 유달리 격앙된 어조였던 게 기억난다.
이전부터 ‘화는 내는 게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다’를 신조로 살아왔다. 아직 나름대로 그것을 지키고자 애는 쓰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내 표정이나 억양을 통해 드러남을 자각한 뒤에는 그 지점이 올 때마다 두통이 일었다. 믿음의 상실에서 오는 분노는 타인만이 대상은 아니었던 셈이다. 내가 내세운 신조를 스스로 부정한 데서 오는, 나를 향한 분노와 믿음의 상실. 나는 자신에게마저 솔직하지 못하며 줄곧 사그라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니 ‘나는 누구와 이야기할 때 내 감정을 숨김 없이 표출하는가?’를 생각해 봤다.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 언행이긴 하지만, 어쨌든 표정이나 억양의 변화는 내가 더 꾸밈 없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일 것이다. 가려진 내 감정을 표출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애정이 안 갈 수가 없다. 한 마디로 나는 ‘이 사람에게 내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라는 고민이 필요 없는, 진솔하게 내 이야기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직까지는 그런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인 것도 퍽 유감스러운 바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머리를 비우고 싶고 집 밖으로 나가기 싫다. 집 안에 짱박혀서 침대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이렇게나 행복한 일인지 몰랐다. 누군가와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줄어드니, 계속 구석으로 나를 내모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계속 뭔가를 하려고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건, 현재의 욕구에 내 미래와 인생 전체가 지배당하는 게 싫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내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없다면, 담배 연기 뿜어내듯 그저 허공에 읊조릴 뿐이다. 내 자조가 메아리쳐서 누군가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나는 언제든 누군가를 좋아할 준비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