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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산결 Jun 20. 2021

산을 맛있게 즐기는 방법

한라산 백록담을 다녀와서

    5월 초 완연한 봄기운에 한창 나른해진 눈꺼풀을 깨우는 반가운 카톡이 도착했다.


 산결아 다다음 주 부처님 오신 날 전후로 한라산 등산 갈래?


    어머니로부터 온 카톡이었다. 산을 좋아하시지만 연휴가 아닌 일정에 한라산까지 함께 갈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보내온 카톡이었다. 나에게까지 연락을 주신 것을 보니 어떤 마음으로 어머니께서 메시지를 보내셨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내가 등산을 시작했다는 얘기에 소녀처럼 기뻐하시던 설렘과 타지에서 일하는 나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뒤섞여있는 듯했다.


    처음에는 잠시 망설였다. 부처님 오신 날이 휴일이라지만 수요일이었던 탓에 일정을 잡기가 조금 애매했다. 그럼에도 언제 어머니와 둘이서 제주도로, 심지어 한라산을 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어머니의 제안을 수락하고 일사천리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번 제주도 방문의 목적은 오롯이 한라산 등반이었기 때문에 2박 3일의 일정임에도 사실상 이동 시간을 제외하면 단 하루 등산 일정이 전부였다. 지난 4번의 한라산 등반에서 맑은 백록담을 맞이하는 것에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꼭 날씨가 허락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등산 전날까지도 검회색의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다음 날 아침 전날의 비구름은 온데간데없이 맑은 하늘이 나와 어머니를 깨웠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서도 백록담을 보기에 최고의 날씨라며 좋은 기운을 한 숟갈 얹어주셨다. 하늘색 도화지에 흰구름이 아로새겨진 풍경에 성판악 탐방로 입구까지 가는 길에 시종일관 기분이 좋았다. 이보다 완벽할 수 없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맑은 백록담을 보지 못할 확률은 전혀 없었다.


    언젠가부터 등산이 좋아졌다. 목표의식이 강한 성격인지라 목표가 있으면 그것만 보고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 목표가 뚜렷해야지만 좋은 삶인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삶의 목적이 흐릿해져 하루하루를 흘러가듯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정상과 하산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등산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등산은 거침없었다. 오로지 정상만을 바라보고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급하게 움직였다. 이것을 음식을 먹는 것에 빗댄다면 나는 빠른 시간 안에 음식을 잔뜩 먹는 푸드파이터에 가까웠다.


    진달래 휴게소를 지나니 어느 순간부터 주변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높은 나무들에 가려져 있던 하늘이 점점 더 눈 앞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고 어느새 하늘 가운데에 솟아있는 정상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참 정상을 향해 걸어가던 중에 어머니께서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몇 마디 말씀을 덧붙이셨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천천히 아껴 먹고 싶듯이 이렇게 멋진 산을 급하게 올라가고 싶지는 않으시다고. 천천히 산을 맛보면서 올라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내가 푸드파이터라면 어머니는 진정한 미식가였다.


    눈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멋진 풍경을 두고도 나는 오로지 정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정상이 아니라 눈, 코, 두 손, 두 발로 한라산과 제주 전체를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 덕분에 나도 그제야 뒤돌아 발아래로 펼쳐진 제주와 먼바다의 풍경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 꾹꾹 눌러 담으며 정상으로 향하는 걸음을 즐기려고 했다. 머지않아 정상에 도착했고 그토록 기대하던 맑은 하늘과 적당히 물이 고여있는 백록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완벽했던 하루. 나를 허락해준 제주의 날씨와 백록담, 적절한 날짜에 휴일과 함께 찾아와 주신 부처님, 그리고 산린이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신 미식가 아니 미산가(美山家) 어머니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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