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뚝딱거릴 순간
J와 만난 지 두 달도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J의 사촌동생분 결혼식이 있었고,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함께 할 것처럼 얘기했다. 두 달도 안 된 내가 그런 소중한 자리에 참석해도 되는 건가 하는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지만, 이렇게 다정하고 예쁘게 자란 J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실지, J가 너무나도 아끼는 여동생은 어떤 분이실지 궁금했다. 그렇게 나는 작년 6월, 남자친구의 가족을 뵙게 되었다.
일단 먼저 밝히자면 나는 여성스러운 편이 아니다. 요즘 시대에 여성스럽다는 표현을 쓰는 건 너무나도 구시대적이지만 아무튼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옷도 치마라곤 없고 죄다 바지에, 결혼식과 어울리는 복장은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사실 무슨 옷을 사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스물넷이었고, 결혼식에 몇 번 가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인터넷으로 하객 복장을 수십 번 검색했다. 최대한 단정하고 J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어쩌면 나답지 않은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처음만큼은 그래야 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여성복 매장을 가봤다.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 옷들을 판다는 생각에 들어가 보지는 못한 그 매장에 말이다. 일단 어떤 옷이 있는지 살폈다. 매장을 세 바퀴는 돌았을 거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계열의 하늘색 블라우스를 발견했다. 나름 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곧장 피팅실로 향해서 옷을 입어봤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지만 꽤나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자신하며 바로 계산해 버렸다. 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더 방황하게 될 터였다. 차마 치마는 못 입겠어서 흰색 슬랙스를 샀다. 이런 건 아무 데나 앉는 나에게 맞지 않아 사지 않았지만 이번 기회에 하나쯤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역시나 안 입고 있지만..)
옷을 사고 나니 정말 실감이 났다. 내가 그의 가족들 아니 가족 + 친척 + 지인들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당일이 되니 면접보다 더 떨렸고 J의 손만 꼭 붙잡은 채 결혼식장으로 발을 디뎠다. 처음 만난 J의 어머니, 그러니까 어머님은 정말 미인이셨다. J의 잘생김의 출처를 찾았다. 내가 J보다 한참 어린데도 우리가 헤어질 때까지 존댓말을 해주셨다. 여기선 J의 예의바름의 이유를 발견했다. J의 가족분들, 친척분들은 모두 유쾌하셨고 다정하셨다. 내가 꿈에만 그리던 가족의 모습이었다.
나는 친척이 많이 없어서 명절 때도 조촐하게 보내곤 했는데, 이런 대가족의 느낌은 나를 이 가족에 속하고 싶게 했다. 그래서 J에게 많이 고마웠다. 나에게 따뜻한 가족의 냄새를 맡게 해 줘서. 물론 우리 가족도 정말 어느 가족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생각한다. 그냥 그 수가 많은 것이 좋았다. J의 여동생, 그러니까 언니는 강아지 훈련사셨는데 그마저도 다정하고 따뜻해서 혼자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 곁에 있을 수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는 몰랐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던 건 확실하다.
J와 결혼식장을 나서는 길에 주차장에 계신 아버님을 만났다. 다음에 또 보자는 말씀이 나를 더 설레게 했다. 짧은 만남이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J가 본가에 갈 때 종종 따라가곤 한다. J의 가족들과 있을 땐 정말 가족과 있는 기분이 들어서 절로 마음이 차는 기분이다. 엄마가 더 보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서울의 엄마가 생긴 듯해 J가 보지도 못했을 눈물을 조금 훔치기도 했다.
사실 어머님 아버님께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나다운 모습으로 J의 부모님 앞에 설 수 있어 기쁘다. 그리고 그런 나를 예뻐해 주시는 엄마아빠께 감사드린다. 이 글을 보는 여자친구들이 많이 떨지 않길, 이 글을 보는 부모님들이 아들을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조금 더 예뻐해 주시길 바라본다. 행복은 우리가 만드는 거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행복하다. J를 만나서, J의 가족을 만나서, 함께할 수 있어 참 다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