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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d Oct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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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전략 ep.1


* 2024.10.04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현주 씨.” 

지훈은 대학병원 2인 실에 들어섰다. 

온통 흰색에 흰색. 포인트라고는 흰색 이불이나 칸막이 천에 작게 쓰인 병원 이름이 전부다. 

햇빛은 창문을 타고 실내를 밝게 비추지만 전혀. 오히려 건강을 해칠 것 같은 병원 냄새와 죽음의 기운만 감돌뿐이다. 

밝은 것이라고는 죄다 눈에 보이는 것뿐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민준 씨한테 얘기 들었어요. 오늘 오신다고..”

그녀는 분홍색 비니를 쓰고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분홍색 비니. 그것은 바싹 밀어버린 머리를 감추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생명의 힘이 희미해진 만큼, 그녀의 눈도 힘을 잃었고 입술도 색을 잃었다. 피부는 희다 못해 누런색으로 황달 기가 돌고 있다. 

이미 삶의 끝자락까지 온 여자다. 이게 옳은 선택일까. 


“네. 좀 나아졌나 해서요. 어때요, 조금 괜찮아진 거 같아요?” 지훈은 손에 든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뭐. 지금 당장이라도 퇴원해도 될 거 같은데. 지훈 씨가 보기에는 어때요?” 현주 씨는 힘겹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래도 되겠네요. 농담도 하시는 걸 보니.” 지훈도 미소로 답했다. 

사실 농담 한 마디로 그녀의 상태를 가늠할 수는 없다. 지훈이 아는 한, 그녀는 어떤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마주한 것이 고작 두 번째이지만 지훈은 감히 확신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부정적인 감정을 속에 오래 보관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태도를 가지게 되었을까. 지훈은 그녀의 힘겨운 미소를 보며 잠시 딴생각에 빠졌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가족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지 않았을까.

그의 머릿속에는 현주 씨의 과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름만 ‘현주’인 인물의 삶이 촤르륵 그려져 나갔다.

지훈은 본인의 합리적인 추론에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만족감을 맛봤다. 그의 추론의 정확성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렇기에 지훈은 그녀의 상황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사랑스러운 여자가 하필이면 형을 만나 형과 함께 한다는 것이 말이다.

하필이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의 가장 더럽고 추악한 면을 마주한다는 것이 말이다.


‘퇴원이라..’

지훈의 딴생각은 이제 다른 쪽으로 자연스레 흘러갔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아마 곧 퇴원하게 될 것이다. 해석에 따라서는 슬픈 방법으로. 그녀가 퇴원 후 보게 될 세상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닐 것이다.

‘그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지훈은 스스로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본인이 아니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고마워요. 지훈 씨. 지훈 씨는 민준 씨랑 참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대화를 하면.. 사람을 웃게 만드는 뭔가가 있어.”

형과 내가 닮았다.. 듣기 거북했다. 

“형은 어때요, 형 때문에 힘든 건 없어요?”

“설마요. 미안한 마음뿐이죠. 저 때문에 일도 못하고 있는데요. 일도 포기하고 옆에서..” 현주 씨는 떨리는 숨을 한번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해요. 이렇게 무슨 말만 하면 눈물이 나오려 하니.. 어쨌든 민준 씨에게는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이제야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게.. 너무 아쉬워.”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형이 일을 못하고 있다니. 

아니. 형은 본인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고 있다. 이제야 그 사람을 만난 건.. 지금이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야, 라니요. 앞으로 살 날 창창한 사람이. 마음 단단히 먹고 이겨내야 돼요. 꼭 그렇게 하기로 저랑 약속해요. 현주 씨를 위해서, 형을 위해서.” 지훈은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또 저를 위해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현주 씨도 앙상한 팔을 발발 떨며 지훈의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걸었다. 

꼭 그렇게 돼야만 한다.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형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네, 과일 잘 먹을게요. 민준 씨는 아마 공원 쪽에 있을 거예요. 제 걱정 말고 대화 오래오래 나눠도 된다고 전해줘요.”

지훈은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 전하려던 말은 꾹 눌러 담았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형을 설득할 기회가 아직은 남아있다.

결과야 뻔한듯하지만, 그럼에도 던져봐야 하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

지훈이 평생 연락을 끊고 살 줄 알았던 형과 다시 만난 것은 불과 2주 전의 일이다. 지훈은 여느 때와 같이 동네의 넓은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미 세 시간이나 화면 앞에서 자판만 두드린 탓에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라고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창밖을 보며 크게 숨을 내쉬고 쌉쌀한 커피 한 모금을 쭉 당겨주면 미미하게나마 집중력은 돌아오기 마련이고,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인 생각으로 폭발력 있게 좌르륵 써 내려가기보다는 쓰레기 같은 글을 진득하게 쓰다 보면 가끔 훌륭한 글이 나오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그 순간 지훈의 머리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인의 목소리와 여기까지만 할까, 하는 생각의 반복뿐이다. 알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또 아니지 않은가. 

머릿속은 더 이상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사실 적어도 한 시간 정도의 휴식은 필요해 보였다. 맑은 공기와 낮잠과 찌든 땀을 배출시킬 운동이 필요했다.

그런데 과연 이 생각이 휴식을 위한 핑계인지, 정말 필요한 전략인지 도대체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가끔은 옳은 전략이 되기도 했고 가끔은 핑계가 되기도 했으니, 그것은 정말이지 상황에 놓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아무리 전략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오늘 할 일을 다 마치지 않은 이상은 엉덩이를 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없고 주변의 소리에 이끌리고 창밖의 자동차와 사람들에게 매료될지라도, 시간을 완전히 비효율 적으로 사용할지라도 그는 엉덩이를 뗄 수 없다. 그의 경험상 직업적인 면에서는 비효율을 견뎌내는 것이 곧 효율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집 딸내미 아직 창창한 나이 아니야? 돈도 많이 번다며?”

“이 아줌마가 진짜.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걔 아픈 지 오래됐어. 벌써 두 달은 됐겠다.”

“아 정말? 왜, 어린 나이에 어디가 그렇게 아파서?”

“암 이래 암. 젊은 나이에 안 됐지 뭐.”

“근데 자기들. 그 집 딸 본 적 있어?”

지훈은 바로 옆자리에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조심히, 허리까지 굽혀가며 인상까지 써가며 목소리 톤까지 낮췄지만 정작 목소리 크기는 낮추지 못한 50대 중반 여성들의 대화에 끌렸다.

“아니?” 

옅은 화장에 단아하게 머리를 묶은 인상 좋은 여성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가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그 집 아들들은 몇 번이고 가게에 찾아왔는데 딸은.. 왜 한 번도 못 본 거 같지?”

“그러니까. 다른 아줌마들은 그쪽 집에 딸이 있는지도 모른다니까.”

“나도 언니한테 안 들었으면 몰랐지?”

“그치. 근데 난 그쪽 네가 탁구장 할 때부터 알고 지냈잖아. 벌써 몇 년 전이야? 어쨌든 간에. 그쪽 네가 탁구장 할 때는 현주가 자주 놀러 왔었거든. 근데 아니 무슨. 엄마는 탁구선수에, 아빠는 말라깽이인데 어디서 그런 덩치가 나왔는지, 튼실한 게 남달랐어. 그래도 어릴 땐 포동 한 게 귀여웠거든? 근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덩치는 더 커지고 인중은 빨갛게 터있고. 아무리 맞벌이로 바쁘다 해도 그렇지, 자식들한테 너무 관심을 안 주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관리가 안 되는 거지. 근데 또 이상한 게, 아들 두 놈은 건장하게 잘 자라더라고? 공부도 학교에서 좀 하는 것 같고. 유독 딸내미만 공부도 못하고.. 조금 이상하지 않아?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점점 탁구장에 찾아오는 일도 없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가 않는 거야. 초반에야 현주는 요즘 안 오네? 하면서 살짝 떠 보기도 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피하고 싶은 주제라도 되는 것처럼 슥 넘겨 버리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지금도 그쪽 네 가게 문 안 닫잖아.”

“뭐요? 딸이 암에 걸렸는데 장사를 한다고?”

“그렇다니까. 사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한 게, 딸이 병실에 누운 지가 벌써 두 달이 넘었거든. 언제 까지고 계속 가게 문을 닫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건 이해하겠어. 근데 그쪽 집은 그 두 달 넘는 시간 동안 가게 문을 닫은 날이 일주일도 안된다니까? 분명 뭔가 있는 거지. 내가 보기엔.. 친 딸이 아닌 게 아닌가..”

“에이, 언니! 그건 너무 갔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어머머? 얘, 내가 언제 이런 말 함부로 하는 거 봤어? 이거까지는 말 안 하려 했는데..” 단발머리에 쭉 찢어진 눈, 성격으로 보나 덩치로 보나 대장이 확실한 여성이 말에 틈을 줘서 이목을 집중시킨 뒤 말을 이었다. 

“나도 그쪽이랑 친분이 어느 정도 두텁잖아. 어떻게 딸이 암에 걸렸다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어? 오성병원이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과일이라도 큰 거 하나 사 들고 가는 게 맞지. 근데 그쪽 딸내미 병실에 웬 남자가 지키고 있는 거야.”

“그게 왜?”

“딱 봐도 아들놈은 아니란 말이지. 분위기가 묘하더라고. 워낙 이상하니까 조금 엿들어봤지. 내가 그런 건 또 못 참잖아. 근데 서로 존댓말에, 별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대화가 혼인 신고 어쩌고 하더라고. 암에 걸려서 누워있는 사람한테 혼인 신고가 웬 말이냐고. 근데 또 그걸 그쪽 부모가 모를까? 난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내 느낌으로는 딸이 뭘 하든 그냥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아. 암으로 누워있는 여자랑 혼인신고를 하겠다는 남자도 미친놈인데, 그쪽 네 부모는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니까.”

“아니, 진짜야 언니? 아니, 신경을 안 쓰면 안 쓰는 거지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또 뭐야?”
 “그 집 성격 몰라? 충분히 벌어도 벌었을 텐데 아직도 장사에 미친 사람같이 살잖아. 그 남자 덕분에 장사에 지장이 없다는 거지.” 

그녀의 말에 깊은 충격을 받은 사람은 함께 있던 50대 여성 둘뿐만이 아니었다. 지훈은 이미 이 막장에 가깝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에 매료된 상황이었고 더욱이나 마지막 결말에 닿아서는 무겁게 내려앉는 듯한 심장과 그로 인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뜨거운 기운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혼인 신고라.. 

그는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훈은 발발 떨리는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런다고 떨리는 숨이 완전히 진정되지는 않지만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천천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천천히 숨을 세 번 내신 뒤 지훈은 노트북을 챙겨 카페를 빠져나왔다.

“현주, 현주, 현주.”

지훈은 얼핏 들었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입으로 뱉어대며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러다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인식하고서는 휴대폰 메모장에 그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는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암, 남 녀, 혼인신고. 

기막힌 우연이 아니라면, 이 익숙한 스토리를 의도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 해왔고 같은 경험을 공유한 남자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순간의 직감이었다. 

그는 본인의 직감이 제발 틀려먹기를 바랐지만, 간절히 바라는 순간 그것이 현실이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그의 경험상 간절한 바람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적어도 본인의 삶에서 간절한 바람은 항상 반대의 상황을 낳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변은 없었다. 지훈이 현주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병실 안에서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틈 사이로는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그의 친 형, 박민준이 있었다. 불안한 직감은 늘 현실이 되고 마는 것이다.



*

병원 밖의 풍경은 건물 내부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의미는 몰라도 보기 좋은 건축물과 예술에 가까운 조경이 간간이 호기심을 끌고 조금만 의식한다면 짹짹대는 새소리를 기분 좋게 감상할 수도 있었다. 주변은 온통 녹색의 풀과 나무들이 따스한 태양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고 냄새는 또 얼마나 상쾌하고 자연적인지. 

병원 밖은 온통 자연적이고 긍정적인 기운으로 덮여있다. 건물의 유리문을 경계로 두 공간의 대비는 극심했다.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부정적 기운을 건물 안에 쑤셔 박기라도 한 듯. 모르긴 몰라도 환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저 건물 안이 아니라 밖의 이 공간이 아닐까. 뭐.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왔어?”

형은 공원 벤치에서 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팔을 등받이에 걸치고 길쭉한 다리를 요염하게 꼬고 앉아있는 남자. 각진 어깨와 잔근육이 돋보이는 흰색 반팔 티셔츠에 통이 널널한 청바지, 그리고 반짝이는 로퍼. 정갈하게 갈라진 포마드 머리에 뒤로 걸친 선글라스.

이 남자에게서는 세련미는 보여도 도저히 신뢰는 보이지 않았다. 현주 씨는 도대체 이 남자의 어떤 부분을 신뢰하는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매력만 있다면 신뢰 따위는 굳이 챙길 필요가 없는 하찮고 귀찮은 선택지에 불과한 것인 걸까.


“화보가 따로 없네.”

지훈이 느끼는 역겨움은 그의 입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보이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그럼에도 민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보이는 건 중요하지. 내가 보기엔 사랑하는 사람을 간호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네.”

“물론. 그렇게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민준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헌신적인 모습 보일 생각 없어. 내가 하고 싶은 건 헌신이 아니라 현주 씨를 최대한 행복한 여자로 느끼게끔 하는 거니까. 내 사람에게 내 최고의 모습을 보이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럴 수 있는데 굳이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지.”

지훈은 주제를 돌리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의미 없는 논쟁으로 힘 빼는 건 무의미하다. 그를 논리적인 말로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아주 짧은 몇 마디의 대화였지만 그 사이에 지훈은 품고 있던 약간의 희망조차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다지는 중이었다.


“현주 씨 만나고 왔어.” 민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 어때 보였어? 상태가.. 썩 좋지는 않지?”

“좋아?”

“무슨 소리야?”

지훈은 형을 가만히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 허. 미쳤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현주 씨 돈을 사랑하겠지. 그만해 이제. 돈이 부족하면 일을 해. 이딴 짓거리 그만하고.”

“왜. 돈은 이유가 되면 안 되나? 그리고 굳이 돈이 아니더라도 난 진심인데. 내 진심을 누가 안다고 떠들어대는지.”

“정신 좀 차리고 살자. 아빠한테 부끄럽지도 않아?”

“부끄럽다니.. 뭐가? 뭐가 부끄러워야 되는데?” 민준은 잠시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현주 씨가 내 시간을 소비해 가면서 지켜 줄 만한 값어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거네?”

“멋대로 해석하지 마. 네가 하는 짓. 그거 사기야.”

“아니. 너 빼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리가 남으로 산지가 얼마나 됐지? 한 9년?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 쉽게 안 바뀌거든.”

“그래 그런 거 같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는 본인 생각이 모두 옳다는 양, 떠들어 대는 거 보면. 각자 신경 끄고 앞으로도 남으로 살면 될 거 같은데? 너만 별소리 안 하면 모든 게 완벽해지거든. 현주의 마지막도.”

“형한테만 완벽해지는 거겠지. 현주 씨의 삶은 철저하게 농락당하게 될 거고.”

“그래 뭐. 그건 알아서 생각하고. 근데 동생아, 난 현주 옆에서 온 노력을 다 쏟고 있거든. 현주의 마지막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나쁠 거 없잖아? 평생 힘들게 버텨온 사람, 마지막만큼은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 그건 가짜야. 네가 만들어낸 가짜 행복이라고.”

“가짜 행복? 네가 말했잖아. 누군가의 믿음은 그의 삶에서만큼은 현실이라고. 현주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현실인 거지. 내가 있어서 현주는 행복한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서 아빠한테 그랬던 거 아니야?”

“.. 그 머리로 다른 일을 해, 제발.”

“생존전략이야. 너도 알잖아. 생존전략. 살아남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민준은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너나 나나 엄마한테 많이 배운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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