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dd Oct 18. 2023

원하는 것

생존전략 ep.2

생존전략 ep.2

*

지훈과 민준의 집은 가난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거리로 통하는 허름한 18평 아파트에서 자랐고, 유행하는 옷은 당연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꽤나 자주 교복 문제로, 옷 문제로 항의를 했지만 그런다고 돌아오는 건 거센 응징뿐이었다.


지훈이 교복을 입을 나이가 됐을 때, 지훈은 자연스레 동네에 하나뿐인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형이 2년 전까지 입었던 교복을 물려받게 되었다. 

형이 2년 전까지 입었던 교복. 그 교복은 형의 몸에 딱 알맞은 사이즈였다. 그러니까 형이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키 175에 몸무게 72킬로가 되었을 때 딱 알맞은 사이즈였다. 형도 이 교복이 몸에 맞기까지는 2년의 시간이 걸렸고, 지훈은 형의 중학교 1학년 시절보다 덩치가 작으면 작았지 절대 크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교복을 어떻게 입으라는 건지.

“엄마, 저 교복 새로 사주면 안 돼요?” 형이 입던 교복에 다리를 깊숙이 밀어 넣어보고 이건 아니다, 싶어 한 말이었다. 

“너 교복이 얼마인지는 알고 그러니?” 그의 어머니 옥자가 말했다. 한심하다는 눈빛은 덤이었다. 

지훈은 올해로 14살이고 경제관념이라고는 하루 용돈 500원 중 200원이라도 남기면 다음날 더 맛있는 간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정도일 뿐, 그 이상은 신경을 쓰지도,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가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은 문구점의 시세 만으로도 충분했다.

“몰라요. 5만 원?” 

“하.. 너랑 무슨 대화를 하겠니.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입어. 알겠어?”

이때 옥자 씨의 말투가 조금이라도.. 아니 지훈이 느끼기에 충분히 상냥했다면 지훈은 아마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4세의 지훈이 느끼기에 어머니의 말투는 굉장히 공격적이고 명령적인 어조를 띄고 있어 일일이 따지고 들어가지 않고서는 지나칠 수가 없었다.

“왜요? 엄마는 누가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어라 하면 입을 거예요?”

“뭐? 박지훈. 너 누가 엄마 말에 말대꾸하래, 어? 이게 오늘 한번 제대로 맞아봐야 정신 차리지? 너 예전에 네 형이 입던 교복 봤어 못 봤어? 형도 너처럼 큰 교복 입고 다니는 거 봤어 못 봤어! 어?” 

“봤어요. 근데 그건 형 교복이잖아요. 이것도 형 교복이구요. 형은 입학할 때마다 교복 사주시면서 저는 왜 안 사줘요?” 

“...” 옥자는 가만히 지훈을 노려보다 말했다. “너 방에 들어가 있어.”

방에 들어가 있어. 그 말은 그러니까 ‘몽둥이 튼실한 놈으로 챙겨갈 테니까 맞을 준비하고 있어’라는 뜻이다. 이때 지훈을 살릴 수 있는 건 초인종, 아버지 용수의 퇴근 후 귀가뿐이었다. 


띵-동-


그때 그 초인종 소리는 기가 막힌 행운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끔, 아주 가끔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  주곤 한다. 지훈은 엄마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방 대신 현관문으로 향했고 옥자도 어휴- 하고는 남편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방 안에 있던 민준은 얼른 모니터 화면을 게임에서 ebs로 돌려놓고 한발 늦게 튀어나와 아빠를 맞이했다.


“왔어요.” 옥자는 새침한 표정에 질문을 질문 같지 않게 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속상한 일이 있었으며, 혹시라도 그걸 눈치채고 무슨 일인지 물어본다면 망설임 없이 말해줄 의향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아니 대놓고 들어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예의상 두 번은 물어봐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원래 말 안 하려 했는데..’ 하며 본인 이미지까지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녀오셨습니까.” 두 아들은 거의 동시에 아빠에게 인사했고, 웬일인지 두 놈 다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용수는 두 아들을 한번 한번 보고는 아내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용수에게 가정은 쉼터가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배분받은 일터다. 쉼터라고 하면 차라리 몇 분 전 앉아있던 아반떼 hd가 더 쉼터에 가깝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옥자는 말없이 돌아섰고 용수는 그 뒤를 따랐다. 

거실에는 이제 지훈과 민준만 남았고, 몇 초 후 민준마저도 “뭘 봐, 새끼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분위기로 보아 또 문제아 동생 놈이 무슨 잘못을 한 거 같은데.. 그렇다는 건 적어도 1시간쯤은 아빠의 관심에서 벗어나 몰래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훈은 일이 생각했던 것만큼 잘 풀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생각을 좀.. 해야 할 듯했다.

그래. 지금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내가 얼마나 억울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또 엄마가 얼마나 과장을 했는지도 논리적으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지훈은 자신이 맞는다는 것 자체가 억울했다. 뭐 새 교복을 사달라는 게 당연한 요구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말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엄마가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말했다면 더 따지고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불안한 긴장감에 아랫배가 아파오고 심장이 빨리 뛰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만히 앉아있자니 불안함이 영 가시질 않아 차라리 좁은 방안을 서성이는 편이 좋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방문 너머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지훈. 너 일로 나와.”

때가 온 것이다. 

지훈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또 내쉬었다. 어차피 혼날 거라면.. 할 말은 하고 혼나자.

“네.” 방을 나서며 지훈은 대답했다.

“앉아.” 아빠는 소파에 엉덩이만 대고 상체를 쭉 뺀 채로 앉아있었다. 

지훈은 아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을 기다렸다. 

“너 뭐야?”

“... 네?” 

“너 뭐냐고.”

“...”

“누가 엄마한테 대들래. 어?”

“...” 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질문이 아니었다. ‘누가 엄마한테 대들래. 어?’ 그러니까 얼른 죄송하다고 말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나이 박지훈.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절대 굽히고 들어가지 못한다. 비록 그 끝이 진흙탕 일지라도.

“대답 안 해?”

“솔직히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자, 시작이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따박따박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래도 아빠의 화가 가시질 않는다면.. 그땐 어쩔 수 없겠지. 

그러나 지훈이 간과한 사실 한 가지는, 아빠의 감정은 지훈이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인 탓에 따박따박 설명할 기회조차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 뭐?”

“저는 그냥 교복이 너무 크니까,”

짜-악. 

아빠의 손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뺨에 닿았고, 그 묵직함은 지훈이 방금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게 할 만했다.

아들의 뺨을 온 힘을 담아 휘갈긴 용수. 그럴 생각까지야 없었지만 지훈의 태도는 차마 아빠로서 넘어갈 수 없었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훈의 자기변호 시간은 마감되었다.

“다시 말해봐.”

짝. 짜악.

용수는 질문과는 다르게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용수가 느끼는 한, 지훈은 사춘기에 들어섰고 사춘기에 들어선 자식 교육에는 폭력만 한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본인의 경험에 따르면 말이다.


지훈은 끝내 새로운 교복을 얻지 못했다. 고작 교복 따위는 폭력을 참아가며, 아빠와의 사이를 비틀어가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입고 등교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고, 부족하다면 용돈을 모으든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든 해서 사야 할 문제이지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강요할 것은 못 되었다. 물론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

민준의 상황은 지훈과 달랐다. 교복은 고작 등교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옷은 고작 중요한 부분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민준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에게 처음으로 여자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유행에 맞는 옷은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엄마, 저 옷 좀 사주세요.”

“너 옷 사주면, 어? 지훈이도 사줘야 되는데 우리 집 형편에 그럴 돈이 어딨어?”

“아, 지훈이는 안 사주면 되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동생 놈과 내가 같은가? 

진짜 공평하게 따지자면 내 옷을 살 때 동생 놈 옷을 사주는 게 아니라, 동생 놈이 내 나이가 됐을 때 사주는 게 진짜 공평한 거 아닌가? 

게다가 그놈은 아직 꼬맹이인 데다, 여자친구도 없을 텐데 옷은 무슨. 민준은 생각했다.


“학생이 옷이 뭐가 필요해? 가서 공부나 해!” 

옥자는 소리쳤고 민준은 투덜대며 돌아섰다. 대화를 더 이어나갈 수도 없었고 더 이어나간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 그가 순순히 돌아간 진짜 이유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 몇 가지 방법이 준비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에게 몇 가지 차선책이 준비돼있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으리라.

비록 그 끝이 부모님의 지갑에 손을 대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민준은 지훈과 달리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거기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다른 쪽에 사용하면 훨씬 더 훌륭한 결과를 낼 수 있는데 굳이 왜 그렇게 하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민준은 원하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가지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이왕이면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말이다.


민준은 늘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장 수월하게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

내가 매일같이 사 먹는 이 브이콘. 이 브이콘을 사 먹는 이유는 무엇이며, 잘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에 대해.

세상의 모든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대해.


그리고 그는 끝내 찾아내고야 말았다. 모든 핵심은.. 수요에 있다.

첫째, 수요가 있는 것을 공급할 것.

둘째,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할 것.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당연한 소리이지만, 당연한 소리이기에 본질인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수요가 있는 것은 뭐고, 수요가 있는 곳은 어디냐?"라는 질문에는 세상이 차차 답해주리라.


민준의 친구들은 대부분 민준보다 용돈이 더 많았다. 그것은 무엇인가. 세상의 답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의미가 있다 한다면 그곳에서 의미는 태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민준은 거기서 수요를 봤다. 

 다른 친구들이라면 그저 아쉬워하고 불평만 할 단순한 사실이지만 민준에게는 아니었다. 

민준은 빛을 찾았다. 

그리고 빚도 함께 찾았다.


“야, 박민준. 두 시간만 더 하다 가자.” 

친구들과 만날 때 pc방과 노래방은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그러나 민준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보통 pc 한 시간과 컵라면 하나 사 먹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 이천 원의 용돈은 딱 거기까지만 허락했다.

“나 돈 없는데?”

“아, 용돈 좀 더 달라해, 좀!”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민준의 대응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빌려줄게. 다음에 갚아.”

“그래 그럼.”

대답은 했지만 민준이 생각하기에 자기에게는 이 돈, 이천 원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하루 용돈이 이천 원인데 어떻게 이천 원을 갚겠는가? 그렇잖아? 이천 원을 갚으려면 하루 동안 용돈을 쓰면 안 된다는 뜻인데 그럼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먹을 과자는 어떻게 사 먹으라고? 

이렇게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을 친구가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친구는 돈을 빌려준 게 아니라 그냥 준거다. 

게다가 이것은,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딱 맞아떨어졌다.

친구들은 민준과의 시간을 원했고, 그에 합당한 대가만 치른다면 민준은 그것을 공급해 줄 의향이 있었다.


민준은 이 친구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냈다. 물론 돈을 빌려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주 유용한 방법을 깨닫게 해 줬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진짜 미안한데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용돈 받으면 금방 줄게.” 

학습능력이 뛰어난 민준은 어느 날부터 이 말을 달고 살았다. 

친한 친구들은 이미 민준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대부분 막 친해진 친구들에게 시도했다. 

막 친해졌다는 것은 아직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는 뜻이고 그렇다는 건 돈을 갚지 않는다고 해서 별로 큰 문제가 될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문제가 생겨봐야 사이가 멀어지기밖에 더 하겠는가. 거기다 고작 이런 일로 사이가 멀어진다는 건 친구의 좁은 속을 잘 들어내주기 때문에 그런 친구와는 애초에 일찍 끊어지는 편이 나았다.


두 번째 방법은 까다로운 작업이 필요한 일이다. 

상태에 따라 가격을 흥정하고, 가능한 한 원산지에서 가장 먼 곳에 내다 팔아야 하는 머리 아픈 일이다. 그러나 가장 수요가 확실한 일이다.

민준이 생각해 낸 두 번째 방법은 교실에서 주운 고가의 샤프를 팔아넘기는 일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은 주운 사람이 임자 아니겠는가? 

이 방법은 다른 어떤 일보다 귀찮았다. 

책상 위에 가만히 놓여 있는 샤프는 스스로 바닥에 떨어질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민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준은 쉬는 시간이면 잠에 덜 깬 척 휘청이며 책상에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은 그런 민준을 비웃었다. 그리고 민준은 그 웃음을 대가로 돈을 벌었다. 

민준은 이 일을 통해 세상에는 절대 공짜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 일은 비웃음과 돈을 교환한 것이기도 했다. 

수요가 조금이라도 애매모호했다면.. 그는 당장 그 일을 접었을 것이다.


아마 그날은 첫 여자친구와 맞는 50일 기념일이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역사적인 순간인가. 

17년의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 그날 벌어진 것이다. 

민준은 이날을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지갑에 돈이 한 푼도 없긴 해도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을. 쉽고 간단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준은 교실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머리를 쥐어 짜냈다.

그러다 툭.

민준의 허벅지가 앞에서 두 번째 책상에 걸렸다. 

그리고 툭.

부딪힌 책상에서 고급 진 샤프 하나가 떨어졌다.

한 번 더 툭.

방법이 튀어나왔다.

민준은 바닥에서 고급 진 샤프 하나를 주웠다. 샤프는 이제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것이다.

민준은 주운 샤프를 저 끝 반에 가져가 절반 정도 되는 가격에 팔아넘겼다. 고객은 소리 질러 좋아했다. 

고객의 이런 반응은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줬다. 하나는 지금 이 일이 충분히 많은 돈을 벌게 해 줄 일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상품의 금액을 너무 낮게 측정했다는 것. 

아.. 너무 싸게 넘긴 건가 했다. 그래도 뭐, 이 사업 아이템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끝 반에서 상품 하나를 더 챙겨 왔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민준은 다시 반으로 돌아왔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이제는 저 끝 반 친구의 것이 되어버린 샤프를 전 주인 놈이 아주 목청껏 찾고 있었으니. 

백날 소리 질러도 뭐,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이미 타인의 소유가 되어버린 샤프가 돌아올 일은 없었다. 얻고자 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겪었는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고, 이 방식에 예외는 없었다. 


민준은 그에게 약간의 연민을 느끼기도 했기에, 그에게 대가를 치를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저 끝 반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얻은 샤프. 민준은 그 샤프를 그에게 내밀었고, 그 친구는 그것을 간절히 원했다. 

너무 간절했던 나머지 민준이 육천 원에 팔 계획이었던 샤프는 팔천 원에 팔렸다. 크게 원하면 크게 원할수록 금액 또한 커지는 법이니까. 


 아, 이 얼마나 불공평한 세상인가. 

민준은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거래를 마쳤음에도 약간의 우울감을 맛봐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이런 노동 없이도 살 거 다 사는데. 

민준은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뼈가 빠지게 움직여야 다른 친구들이 누리는 여유를 겨우 누릴 수 있었다. 남들과 같은 선에 선다는 것. 

그 평범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뼈 빠지게 노력해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악을 만드는 것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결국 없는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해야 했다. 남들은 이기심이 타고난 탓에 ‘도움’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했으니 방법은 스스로 찾아내야 했다.

그러니 민준이 나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이었다. 

인간은 감정과 상황의 노예이고, 그런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럴 만한 상황이 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진실이니 말이다. 

‘나쁜 짓 안 하고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해 주시면 절대 나쁜 짓 안 할게요. 맹세합니다.’ 

그때부터 민준이 부도덕한 짓을 하는 이유는 죄다 세상 탓이 되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안 들어준다면 그냥 나쁜 짓 하고 살라는 뜻이지 뭐. 당연한 것이었다.

이전 01화 인트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