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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수염

피부에게도 휴가가 필요하다.

by 이쁜이 아빠

아침 거울 속에 낯선 내가 서 있었다.
턱과 볼에 거친 수염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32년 동안 매일 아침 면도하던 사람이, 사흘이나 면도기를 잡지 않은 얼굴이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면도는 나의 의식이었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면도기를 드는 순간,
오늘 하루를 준비한다는 신호가 켜졌다.
그 습관은 32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동생 일을 도와주러 나가면서 마음을 바꿨다.
“오늘은 그냥 두자.”
그날부터 사흘 동안, 내 얼굴 위 시간은 거꾸로 흐른 듯했다.
핑계는 바빴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속마음은 달랐다.
피부에게도 휴가가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던 거다.

면도를 하지 않은 아침은 이상하리만큼 느긋했다.
거울 속 나는 조금은 거칠고, 조금은 자유로워 보였다.
날카로운 칼날 대신 부드러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순간,
그동안 몰랐던 해방감을 느꼈다.

수염이 길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작은 변화가 되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동작으로 이어진 삶 속에서
잠시 멈춰 설 수 있다는 가능성.

아마 앞으로도 나는 다시 매일 아침 면도를 할 것이다.
그게 익숙하고, 나를 단정하게 만드는 습관이니까.
하지만 가끔은 수염에게도 휴가를 줄 생각이다.

왜냐하면,
아빠의 수염이 쉬는 날은
아빠의 마음도 쉬는 날이니까.

#은퇴#아빠수염#휴가#피부관리#남자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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