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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카 Dec 05. 2018

나를 마주하는 새벽

파랗게 멍든 시간들.17

어느샌가 겁이 많아져 버렸다. 스무살때, 아니 군대 전역하던 나의 스물셋 시절만 하더라도 나는 잘 해낼거라는, 잘 해낼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자존감이 아닌 자신감. 그리고 2년이 지나 지금, 서럽고 아팠던 나날들이 지나 어느덧 한해의 마지막 달이 와버렸다. 올해는 돌아보면 참 많은 것을 잃고 얻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겹겹이 쌓이는 상처끝에 나를 잃어보려고 했었고, 어떻게 살게 되어 살고 있다. 나를 용서 할 수 없었던 계절과, 치유의 계절이 지나 한해의 초로가 되는 계절이 왔다.

상처를 받고 한순간에 많은걸 잃으며 자신감이 사라졌을 때 나는 자존감이 참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을 주어 다짐했던 모든것들이, 어느덧 절실하게 하루를 살아가게 만들었다. 나의 삶은 하루를 안온히 마주하고 보내는 것, 그 자체가 절실해졌다. 내일이 기대가 되지 않아서 죽고싶었고, 어떻게 꾸역꾸역 살아나고 나니 죽기 싫어서 버티고 버텨왔었다. 내 남은 삶에 큰 도움이 될것도 없으면서. 하고 싶은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의 기준이 허물어져 어느것도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었다.

그저 남의 불행을 보며 자위하는것이 나의 삶에 큰 낙이었다. 그런 나를 마주했을때 나는 자기연민으로 가득찬, 비겁한 놈이었기에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은 마약같아서 내가 그래도 살만한 놈이라는 자신감이 조금씩 차올랐다. 다시 현실을 마주했을땐 자신감도, 자존감도 바닥난 한심한 존재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오늘도 나는 많은 핑계를 대고, 스스로 만든 서러움속에 갇혀 무릎만 끌어 안은채 꺼억-꺼억 울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나 또한 머물러 있어도 아무 의미 없을 것을 알기에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더 나은 내가 되겠지 하며 또다시 자기위로만 가득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나아질거라고, 어쨌든 나아지고 있다고. 사실 변한건 없다. 그저 아픈것도 계속해서 아파하다보니 무뎌졌을 뿐인거고 욱신거리는건 어쩔 수 없다. 그치. 이게 흉터지. 어릴적 친구들과 놀다가 깨어진 유리조각에 머리가 찢어졌을 때, 꿰맨 흉터가 아직까지 욱신거리는 것 처럼. 가끔 욱신거릴 뿐인거다.

그래. 괜찮았던 적 없다. 아직도 사람이 힘들고 아프다. 몇번을 깨지고 베이고 상처입고 상처주고 하더라도 유일하게 무뎌지지 않는건 사람인 것 같다. 결국 잠깐은 변하더라도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고 그런 내가 이해가 안되는 오류투성이의 삶이겠지. 변하는 그 당시의 다짐들은 어차피 나에게 도움이 되질 않는걸. 여전히 남의 불행을 말하는 뉴스가 나의 위로가 되고 나보다 힘들고 슬픈 사람들의 사연속에서 울어주며 속을 해소하는 눈물을, 동시에 나는 그렇게까지 힘든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위안의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비겁한 용기를 내고 나면 남들과 다르다고, 또 이겨낼거고 해가 뜨면 나의 불행과 우울은 그림자 사라지듯 사라질거라고 믿어버린다. 이런 내가 용서가 안되는 자기혐오가 다시 몸을 벌레처럼 기어 오르고 또 상처받고,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면서 깨달음만 얻는 반복적인 삶의 굴레속에 몸을 맡긴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아니다. 무엇이 어른인지도 모른다. 그저 살고 싶다. 그렇게, 그렇게 살다보면 행복해질것만 같다. 언젠가 한번쯤은 나도 행복해질 수 있겠지. 더이상 스스로를 속여가며 믿게 되는 행복이 아닌 진실된 행복이 나를 찾아오겠지. 제발. 제발 그러길 바란다. 제발 나도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을 쉽게만 생각하던 내가, 그런 생각들이 그런 나의 모습들이 비겁하고 역겹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분명 잘 살아내고 싶었을 뿐인데 안주하고 있던 나를 마주하는 새벽이다. 그저 비릿한 새벽내음이 코끝을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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