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ane Anne
Nov 12. 2021
그날 아침에는 작은 애 친구 엄마와 커피 약속이 있었다. 요즘은 립스틱을 바르지 않는데, 마스크를 내리고 커피를 마셔야 하니, 좀 더 생기 있게 립스틱을 살짝 발랐다.
매일 아침, 나는 사실 좀 고민이 된다. 커피 한잔을 하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 마끼아또 한 잔에 친구를 마주하는 것도 좋지만, 혼자서 뭔가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 시장을 보고, 공원을 산책하고, 집을 정리한 후에 식탁에 앉아서 사부작사부작하는 것이 나는 좋다.
어쨌든 그날 아침, 학교 앞에서 친구는 사정이 생겼다고 했다. 괜찮다, 어차피 립스틱만 하나 더 발랐을 뿐이었으니. 마침 등교 준비시간에 와 있던 카톡이 생각났다. 오늘 만날 수 있나? 는 다른 친구의 연락이었다. 당연히 된다. 방금 다른 약속이 취소되었으니까. 오랜만에 본다. 그녀의 아이들은 아직 어려 병치레가 잦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잘 나가고, 무탈해야 만날 수 있는 친구이다. 일찍 베트남 쌀 국숫집에 가자고 한다. 나는 그곳에 보통 점심때쯤 갔었는데, 친구 따라 아침에 가니, 단정하다. 막 시작된 깨끗한 느낌에 뜨끈한 고깃국물이 깔끔하다. 스프링롤도 아침이라 아주 바삭하다. 그녀가 은행에 가야 한다, 고 슬그머니 얘기를 꺼낸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이곳에 살면서 은행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최근 계좌를 개설했는데 매달 수수료로 몇 유로씩 빠져나가서, 무료인 곳으로 옮겨야 된다고 했다. 무턱대고 용감하게 쌀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갔다. 한 마디, "새로운( New)"를 말했더니, 직원이 눈치 빠르게 바로 척척 새 계좌를 만들어준다. 그녀는 내가 있어서 일이 잘 진행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그녀 옆에 앉아있기만 했는데. 그렇게 말해주는 그녀의 마음이 예쁘기도 하지만, 때론 곁에 누가 있으면 없던 힘이 생기기도 하니 맞는 말이기도 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사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미루고 있던 일이었다. 매주 금, 토, 일은 치보(Tchibo)에서 커피 2+1 행사를 한다. 미리 번역해 놓고,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중간 강도의 커피를 3개 추천해 달라고. 그리고 기계에 그려진 모카포트 그림을 가리켰다. 잠시 직원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이내 다른 직원에게 영어로 된 단어들을 물어봤다. 그리고 우리는 웃었다. 곧이어 곱게 간 크리미, 아프리카, 라틴원두 세 봉투가 들려졌다. 넓지 않은 매장에서 우리는 이래저래 알게 된 슬로박 단어들을 직원은 어떻게든 영어단어들로 짧게 내뱉는, 다소 흥분되고 들떠는 아무튼 마음이 통하는 스몰토크였다. 옆 창구에서는 마실 커피를 주문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듯한 이 분과도 즐거운 말들이 오갔다. 잠깐 들어간 치보 매장이었지만, 마치 재미난 곳을 다녀온 듯하다. 눈빛과 미소가 언어를 초월한 느낌은 참 좋다.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이곳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뭐라 하시지만, 세계에서 배우기 어렵다는 한국말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이곳 말을 익히는 건 쉽지가 않다.
그리고 다음은 공원으로 향했다. 테이크 아웃한 커피를 마시다, 그녀가 마트를 가자고 한다. 사실 오늘은 남편이 집에 있다. 자재가 부족해 갑자기 휴일이 잡혔다. 하지만, 이런 날 오히려 약속이 있어서 나는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물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거절할 생각도 없이 냉큼 다시 차에 올라탔다.
마트는 크리스마스 용품들과 다양한 초콜릿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주방제품들이 크리스마스 행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80유로짜리 프라이팬을 12유로에 샀다. 200년이 넘은 네덜란드 브랜드라는데 바닥도 두껍고, 디자인도 괜찮아 보였다. 그녀도 나의 쿠폰으로 이것저것 샀다. 가격도 싸고, 제품들도 좋아 보여 돈을 쓰면서도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다.
돼지족발용 고기를 사고, 정향과 팔각 등 향신료도 샀다. 한치처럼 부드러운 냉동 오징어도 구입했다. 얼마 전에 발견한 건데, 숙회로 해서 먹었더니 맛이 좋았다. 그녀는 내게 새로운 먹거리를 알게 되고, 행사용으로 나온 프라이팬을 사게 되어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날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도 했다. 그 말에 나는 속도 없이 기분이 좋다. 그녀의 매력이다.
오늘은 남편 점심 차려줄 시간도 없이, 바로 아이들 픽업을 위해 또 나가봐야 한다. 어떡하다 남편에게는 한가한 날이, 어떡하다 나에게는 분주한 하루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