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01
너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꽃을 피우고 너의 색을 바꾸고 너의 일부를 떨어뜨리며 다시 피어나며 그렇게 우둑하니 너의 자리를 지켰니, 그동안 이렇게나 이쁜 너를 보려고 얼마나 돌고 돌아 이곳에 온 걸까, 나는 왜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꼭 일 년 만의 푸르름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나 나무를 좋아하는데 나는 왜 우리나라에 있는 서울숲 조차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고 있는지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 오래 머물고 싶으면서도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와 두 시간 거리 즈음에 있는 보골은 인도네시아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이자 나무의 도시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제일 지대가 높은 이곳은 인도네시아 답지 않은 선선한 바람과 쨍한 햇빛 그리고 꽤 자주 내리는 비 덕에 식물들이 우렁차게 자라 있다. 햇빛과 나무를 좋아하는 내게 보골은 동화 속 같이 들어가도 들어가고 싶은 곳이었다.
외국인 친구에게 초대받은 만찬에 인도네시아 말이라곤 감사인사밖에 모르는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가뜩이나 동남아 음식을 못 먹는 탓에 말도 못 하고 먹지도 못하는 바보가 된 저녁이었다. 속이 상했다. 누군가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도 여행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해놓고 어우러지지 못하는 것도, 나 자신이 부끄러워져 버렸다. 속상했던 내가 눈에 띄셨는지 ‘네가 이상해서 못 먹는 게 아니라 처음이라 이상한 거야’ 라며 나를 수시로 달래주신 친구에게 파묻혀 울고 싶기도 했다. 숙소에 돌아가는 길, 친구의 차는 좋은 차였지만 울퉁불퉁한 길 탓에 차는 덜컹거렸고 손잡이를 잡지 않고 그대로 몸을 들썩거리며 차에 몸을 맡겼다. 그냥 힘을 들이고 싶지 않은 저녁이었다. 느지막한 시간 속 보골의 하늘은 그림 그 자체였다. 반대색인 파란색과 빨간색이 어쩜 저리 잘 어우러질 수 있는 건지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다 친구 몰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가만 서서 바라보고 싶은 이 풍경을 지나치는 것 또한 너무 속이 상했다.
제멋대로 자란 나무에게 누구 하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인도네시아가 후진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며 별 느낌이 없었는데 이곳에 와서 많은 것들을 바라보니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 아무 느낌을 느끼지 못한 내가 한없이 창피했다. 배울 점이 너무나 많았다. 제멋대로 자라는 나무들을 더 잘 자라라며 큰 보호대를 쳐 주는 것, 길을 방해하는 나무들을 위해 또 다른 길을 만드는 것, 자연을 자연답게 두는 것, 확실히 뇌리에 새겨야 하는 것들이었다. 오랜만에 혼자 싱글벙글 노래를 들으며 걸었던 보타닉 가든의 이른 오후도 빨간빛이 어우러졌던 이곳의 저녁 하늘도 늦은 밤이 되니 너무도 눈에 선했다. 숙소에 돌아와 소파에 몸을 기대어 가만히 책을 읽다 이렇게 글을 쓰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조금 펑펑 울어버렸다. 속이 시원했다. 선바람이 분다. 책을 내려두고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바람에 흩어지는 풀잎의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온몸에 실어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잔디밭에 뒹구는 상상을 해본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왔으니까, 그렇게 다시 돌아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기대치 않았던 보골의 두 번째 날이 이렇게 흐르고 있었다. 붙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