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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게으름뱅이

프리랜서 작가와 배우의 공통점은?-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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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체로 성실합니다. 한 번 정한 약속은 가능한 한 지키려고 노력하고, 정해진 루틴에서 웬만하면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지런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만 간신히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실한 게으름뱅이에 가깝습니다.


사실 프리랜서 작가란 직업은 캐스팅되기 전의 배우와 비슷합니다. 누가 날 찾아주지 않으면 아무런 할 일이 없어요. 배우가 관객이나 카메라 없이 연기하지 않는 것처럼, 프리랜서 작가도 내 글을 실어줄 매체와 원고료가 없인 글을 쓰지 않습니다. 뭐, 간혹 개인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의뢰받은 원고를 쓸 땐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글 한 편 올리지 않고 방치합니다. 이러니 블로그 조회 수가 올라갈 일이 없죠.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일상의 기록은 아주 사소한 일일 뿐인 것을요.


다시, 배우와 프리랜서 작가의 공통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뭐, 다들 아시겠지만, 배우가 영화나 드라마에 캐스팅되려면 남과 다른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이 필요합니다. 얼굴이 잘났든, 연기를 잘하든, 피지컬이 훌륭하든, 대외관계가 좋든, 남보다 유명하든, 뭐 하나라도 있어야 배역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건 프리랜서 작가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아니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 많아요. 그러니 뭐든 하나라도 클라이언트가 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필요합니다. 대체로는 그간 작업해온 포트폴리오나 프로필이 될 테지만, 가끔은 이것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클라이언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구두 계약을 맺었는데, 그 일을 의뢰한 원클라이언트가-저의 클라이언트는 대개 편집 기획사나 출판사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일을 주는 원클라이언트는 따로 있게 마련이죠. 주로 대기업들입니다.-저보다 유명한 사람이 콘텐츠 디렉터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네요. 클라이언트가 저에게 그 얘길 해주며 '우리는 너와 일하고 싶지만, 그러려면 너는 콘텐츠 디렉터가 아닌 그냥 작가로 참여해야 된다, 괜찮겠냐?'라고 물었습니다. 질문을 하는 클라이언트의 어조는 사뭇 조심스러웠고 제가 기분이 상했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작가로 참여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새로 오는 콘텐츠 디렉터가 나 말고 다른 작가와 일하고 싶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되물었지요. 그러자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너와 일하고 싶으니 작가로 함께 작업하는 건 관철시킬 수 있다'라고 저를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렇게까지 저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해주다니요. 하지만 내심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이 일은 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잘 되면 좋지만 작가로 참여하는 것조차 안 될 수도 있다'라고요. 프리랜서 작가로 15년쯤 살다 보면, 없던 촉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잘 될 것 같다가 중간에 엎어진 일이 하나둘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유명세가 없어서 중간에 떨어져 나간 일도 꽤 되고요. 뭐, 그렇다고 스스로를 비하하진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 프로필도 그리 나쁘진 않거든요. SKY는 아니지만,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제가 대학에 진학하던 무렵에는 그랬습니다.-상위권 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한때 몸 담았던 회사들도 이쪽 업계에선 알아주는 회사인 데다가, 잡지 기자로 꽤나 오래 일했으니까요. 그동안 프리랜서 작가로 해온 작업들도 훌륭한 포트폴리오로 인정받고 있고요. 대외적으로 유명하지 않을 뿐, 저는 일 잘하는 상급의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한 번 저와 작업한 클라이언트들은 꼭 저를 다시 찾는 편이고요. 하지만 이렇게 유명세가 없다는 이유로 원클라이언트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때면 어쩔 수 없이 속상한 맘이 들긴 하네요.


물론, 그렇다고 상심하진 않습니다. 뭐, 이 일에 유명세가 필요하다면 유명해질 방법을 찾는 게 좋겠죠. 도전은 싫어하지만, 오기는 좀 있는 편이니까요. 저의 특성 중 하나인 성실함도 이럴 때 빛을 발할 수 있을 테고요. 보통은 '성실한 게으름뱅이' 중 '게으름뱅이' 쪽에 방점이 찍히지만, 유사 시엔 '성실한'에 방점을 찍어야겠죠. 배우들이 언젠가 캐스팅될 때를 대비해 평소에도 성실하게 연기 연습을 하고 몸을 만들어가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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