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기억
아빠가 기억하고 있는 내 모습은 내가 딱 아홉 살 언저리 일 때라 그때 유독 심했던 비염, 팔뚝에 퍼져있던 햇빛 알레르기 같은 것들만 자꾸 말했다. 비염은 예전처럼 심하지 않고 나아졌지만, 아빠는 그때의 기억만 진했다. 하루종일 기침을 하며 울던 내 모습만.
'코 훌쩍이는 거 그거 어릴 때 비염 못 고쳐서 그런 거야. 네 엄마가 병원만 빨리 갔어도 바로 고쳤어 미련하게 병원을 안가서는. 이제는 못 고쳐 그거 쯧.'
아빠는 미안한 표정보다 원망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자격이 없는 아빠 입에서 나오는 엄마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대답이 나왔다. 그랬더니 알았어.라는 단답과 아까와는 다르게 금세 서글퍼진 눈빛. 그 눈빛은 항상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차라리 좋았던 기억이 없었다면 완벽하게 원망하고 미워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 그리고 이내 온몸에 녹아드는 자책감.
아빠는 그러니까 내가 중 고등학교, 또 대학엘 들어가고 아빠도 가졌었던 스무 살의 청춘을 나도 가졌고 이제 완전한 사회의 구성인이 되었다는 걸 자꾸 잊었다. 10년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2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우리가 공유한 기억이라곤 할머니 장례식뿐이었다. 아빠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잘 살아. 잘 살면 돼. 하는 말만 반복했다. 아빠는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못하는 자신을, 잘 살면 돼. 그러면 돼.라는 말로 자꾸만 숨겼다.
#나의 남자친구 j
아빠는 내 남자친구를 궁금해하면서도 그리 깊게 알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내 남자친구 J가 한국국적이 아니고, 이곳에서 타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말했을 때, 아빠는 '많이 외롭겠다.' 이 한마디만 했다. 외롭겠다. 그 문장이 다시 나를 막연하게 서로의 존재만을 확인하던 그 10년의 세월 속으로 빠뜨렸다. 그 속에서 혼자 서 있는 아빠를 보자니 그냥, 죽도록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왜 아빠의 한마디로 나는 무한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걸까.
아빠는 '남자친구 얼굴 한번 보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