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에서 혜자는 어린 아들이 사고로 다리를 잃게 된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회한을
‘기억의 왜곡’을 통해 되돌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의 알츠하이머는 그를 가장 행복했던 기억의 시간 속에 살게 해준다.
“어머님은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어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묻는다. 어머니는 말한다. “대단한 날은 아니구. 나는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온 동네 다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안쳐놓고 그때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을 나가요. 그럼 그때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져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그때가.”
아마도 삶의 행복한 기억들이란 사진 한 장에 담겨진 일상의 순간들이 아닐까?
'드라마 속 대사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있다.— 정덕현 '
보통의 하루, 일상 속에서의 행복을 바라는 난
2026년 1월 1일, 오늘이 최고의 날이 아닐 수 없다.
12월 31일,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고
익숙한 내 공간으로 늦지 않은 시간에 귀가해
먹던 반찬으로 특별한 음식 하나 없는 저녁 식사를 하고
다음 날이 휴일이니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잠을 청했다.
한때는 나도
새해 처음 뜨는 해를 보기 위해
산과 바다가 있는 곳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1월 1일에는
내 일상의 공간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늦잠 자고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새해의 시작이다.
결코 게을러서도,
흥이 없어져서도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새해에도 내 일상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해졌고,
그래서 더 일상 안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꽤 오랫동안 산타 할아버지를 믿었다.
시골에서는 계절의 소리가 정말 잘 들린다.
겨울이면 세찬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 바람과 함께 낙엽이 날리는 소리도 또렷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썰매를 타고 오시느라
그래서 소리가 더 크게 들리나 싶어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머리맡에는
초코파이 한 개와
분홍색 강아지 인형이 놓여 있었다.
동생도, 부모님도 건강했고
우리는 늘 함께였다.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한 해, 또 한 해가 흘러
자식들은 모두 독립을 했고
부모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다.
연말쯤이면 나는
두 분이 드실 간식을 두 손에 들고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찾아뵌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행복했던 순간들은
모두 그곳에서의 기억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과
자연 속에서
함께 지냈던 시간들,
말없이 흘러가던 하루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일까.
새해를 맞는 방식도
조금은 달라졌다.
더 큰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지금의 일상을
조금 더 오래 지켜내고 싶다는 마음.
아프지 않고,
무탈하게,
별일 없이 흘러가는 하루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새해 첫날,
어디 멀리 가지 않아도
지금 이 자리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해가 중천에 떠오른 뒤에야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 평범함이
이제는
내가 바라는 가장 큰 행복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최고의 날이라 부른다.
2025년 12월 어느 날 해질 무렵의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