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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Dec 13. 2020

레트로 감성

When I was your age,

 '라떼는 말이야!' 하는 순간, 나이에 상관없이 들려오는 꼰대 소리.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건, 현시대에 맞지 않는 교만한 조언이 아니라, 그 시절이 담긴 순수했던 추억이다.


 90년대생인 나는 2000년대 감성을 가끔 그리워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사람들은 다 함께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가족과 연인, 때론 처음 만난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한마음으로 응원을 했다. 사실 그 시절의 나는 유치원생이었기에 자잘한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Be The Reds'라는 문구가 새겨진 그 새빨간 옷을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4년이 흐른 후 다시 돌아온 2006년 월드컵 시즌엔, 꼭짓점 댄스가 유행하면서 다 같이 박자에 맞춰 그 춤을 췄었다. 몸치인 나도 어렵지 않게 따라 했었다.


 초등학교에 발을 디딘 지 얼마 안 되었던 때, 조막만 한 용돈이 생기면서 문구점에서 불량 식품을 사 먹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500원만 있어도 행복했었다. 한 봉지에 여러 알이 들어 있던 알록달록한 껌들, 먹다 보면 혓바닥이 새파래졌던 페인트 사탕, 빨대를 쪼옥 짜 먹으면 달콤 새콤한 맛이 나던 아폴로, 원기둥 모양의 매콤 짭짤한 과자가 3개 들어 있는 차카니, 추운 겨울 학원 난로 위에 구워 먹었던 쫀드기까지. 이 모든 게 100원에서 비싸야 300원 정도였다. 요즘엔 100원으로 살 수 있는 간식거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저렴했던 만큼 몸에 좋진 않았던 '불량' 식품이었기에, 건강을 위해선 사 먹지 않는 게 좋겠지만 안겨준 추억이 많아 후회보단 그리움이 더 다.


 불량식품만큼 좋아했던 또 하나의 어린 시절 간식. 바로 '컵 떡볶이'다. 500원으로도 적당이 배가 채워지던 겨울 인기 간식. 요즘도 포장마차나 문구점에서 팔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꽤 여러 곳에서 사 먹었는데, 맛이 다 달라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먼저 가장 학교랑 가까웠던 문방구 떡볶이에선 카레 맛이 났다. 준비물을 사러 갈 때 돈이 남으면 자주 사 먹었다. 카레 자체를 좋아하진 않는데 떡에서 느껴지는 카레 맛과 향은 왠지 좋았다. 두 번째는 포장마차 컵 떡볶이다. 포장마차가 아파트 근처에 있었는데 속셈학원이 끝나고 학원차를 안 타고 집까지 걸어가는 날엔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떡볶이는 살짝 매콤하고 자극적인 고추장 맛이 났다. 떡볶이의 정석이랄까. 추운 겨울에 어묵 국물과 함께 먹으면 가슴이 매콤 따스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소. 이곳이 사실 진정한 떡볶이 맛집이었다. 


 2012학년도부터 법적으로 초. 중. 고가 주 5일제를 실시해 지금은 토요일에 등교를 하지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격주로 토요일에 학교를 나갔다.(안 나가는 주의 토요일을 우린 '놀토'라 부르곤 했다) 12시에 학교가 끝나면, 나를 포함한 많은 아이들이 집으로 가기 전에 들르던 곳이 있었다. 바로 할머니가 운영하시던 분식집이었다. 학교 가는 토요일만 되면 항상 그곳이 아이들로 복작거렸다. 고추장 떡볶이 말고도 짜장 떡볶이도 파셨는데 둘 다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그날만 돌아오면 엄마에게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받아 고추장 떡볶이 1000원어치, 짜장 떡볶이 1000원어치를 포장해 집에서 동생들과 나누어 먹었다.(컵으로도 살 수 있었지만 맛있는 만큼 많이 먹고 싶었기에 자그마한 스티로품 그릇에 각각 포장해 갔다) 그렇게 여러 번의 토요일이 지나가고 또다시 토요일이 돌아왔을 때, 분식집의 문이 꽁꽁 닫혀 있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열리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아지셨다고 했다. 맛있는 떡볶이를 못 먹는 아쉬움보다 다른 감정이 흘러 들어왔다. 빨리 완쾌하시길 바라며 기다렸지만, 끝내 분식집은 열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간식엔 이렇듯 즐거움, 행복감, 슬픔의 여러 감정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의 나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안 되겠다. 침이 계속 고이니 음식 얘기는 이쯤에서 마쳐야겠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후엔 점차 아이돌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당시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학생, 군인, 경찰 등 다양한 연령과 직종의 사람들이 텔미 춤을 추어 인터넷에 올렸고, 소녀시대 Gee가 나오면서 알록달록한 스키니진이 유행했다. 그 당시 나는 패션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색깔 있는 바지를 사 입진 않았다. 대신 '뚜뚜루 뚜뚜뚜 키싱 유 베이베'를 흥얼거리며 키싱유에서 본 엄청 큰 막대사탕을 좋아했다. 이때쯤 가요를 처음 알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음악 감상이 취미가 되었던 것 같다. 나이가 한 자릿수 일 때는 아는 노래가 '네모의 꿈'. '독도는 우리 땅',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등의 노래가 다였는데 가요를 알게 되면서 뭣도 모르는 나이에 사랑과 이별 얘기가 담긴 가사를 주구장창 불러댔다. 이제는 리듬보다는 가사에, 뻔해져 버린 사랑 이야기보다는 요즘의 텁텁한 삶에 위로를 건네주는 노래들에 더 귀를 기울이는 어른이 돼버렸다.


 친구들과 했던 놀이들도 생각이 난다. 정확히 몇 년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한창 '스티커 북'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스티커 북 안에는 속옷만 입은 캐릭터가 있었고 따로 옷 스티커를 구입해 옷 입히기를 하는 놀이었다. 자주 탈부착을 하면 접착력이 사라지기에 신중히 붙였던 기억이 난다. 다른 친구에게 내가 원하는 옷 스티커를 발견하면, 서로 교환하기도 했다. 요즘도 판매하고 있는지 알아보니 중고 나라에서 10만 원에 팔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골동품이 돼버렸다니. 또 다른 놀이는 '교환 일기'였다. 문구점에서 버튼식이나 자물쇠식 노트를 사서 일상을 담은 일기를 하루는 내가, 다음 날엔 친구가 써서 서로 맞교환했다. 재밌는 일이 많았는지 빈 공간이 없을 정도의 빽빽한 장도 있고, 심심한 일상을 보냈던 건지 대충 그림(눈은 꼭 초롱초롱하게 그려 넣었다)으로 공간을 채운 장도 있었다. 싸웠는지 쑥스럽게 사과의 말로 시작한 글도 있었다. 화장실도 꼭 같이 가야 했던 친구들이었지만, 이젠 대부분 사이가 너무 멀어져 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시야가 조금씩 넓어질수록,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나의 사적인 면을 내어줄 공간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다. 또 조금은 그래야만 서로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전자기기 사용 시간이 많아졌다. 작은 MP3 플레이어를 사서 노래를 듣고 폴더폰이나 슬라이드 폰으로 자판을 꾹꾹 눌러가며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며 부모님께 전자사전을 사달라 조르기도 했다. 흰색 아이리버 전자사전으로 기억하는데, 사실 영어 찾는 시간보다 다운 받아 놓았던 인터넷 소설을 읽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백원의 '나쁜 남자가 끌리는 이유', 귀여니의 '내 남자 친구에게'의 주인공들에게 빠져들었다(영광스럽게도, 귀여니 작가는 같은 고등학교 선배님이다). 또 인터넷 얼짱 붐이 일면서 인소들의 주인공에 어울리는 얼짱들을 가. 캐(가상 캐스팅)로 설정하기도 했다.

지금은 간지러워 못 볼 문장들이 수두룩하지만, 감수성이 충만했던 10대 때여선지 슬픈 장면에 엉엉 울기도 했다. 그리고 대망의 '싸이월드'. 파도타기로 친구들의 공간에 놀러 가면 내 홈피에도 놀라오라며 방명록에 '반사'를 남겼고 선물 받거나 구매한 도토리로 배경 음악을 사기도 했다. 친구와 찍었던 사진을 올리거나 남에게 보여주기 힘든 비밀 일기도 썼다. 지금 보면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는데, 미니 홈피만 들어가면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어른 놀이를 했다. 감정 과잉의 청소년기를 지난 지금, 오히려 터져야 할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담을 줄도 알아야 하는 어른이 돼버렸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땐 마음껏 터뜨려야지.


 어린 시절을 거의 잊은 줄 알았는데, 더듬어가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순간들이 고여 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미화되었는지 흑역사보단 좋은 기억들이 많다. 추억 소환에 집중하다 보니 당연한 사실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어차피 흘러간 과거엔 나쁜 기억보단 좋은 추억이 많을 테니 며칠 전의 흑역사를 애써 밤에 양념까지 곁들여 가며 들추지 말기로. 나의 부모님 세대와 현재 10대인 학생들에게도 추억거리는 서로 다르겠지만 과거의 따스한 순간들은 모두 고여 있을 것이다. 현재가 힘들 때 좋은 과거를 가끔씩 꺼내어 보면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조금은 말랑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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