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오후 산책을 나섰는데, 몸에 닿는 공기가 선뜩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양산을 쓰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을 정도였는데, 시시 때때 변화는 날씨가 놀랍다.
한 시간 반 정도 산책로를 돌고 동네 골목으로 내려가는데, 봄철에 쪽파를 나눠주시고 사탕을 주셨던 어르신이 맞은편에서 올라오신다. 봄에 만나고 여름 내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서 나는 너무나 반갑다. 어르신께 인사를 했지만 어르신은 나를 몰라보신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매 번 마스크를 한 상태였고, 우리가 만난 건 여름을 건너뛴 봄이었다. 그 사이 나의 분꽃은 백 송이를 넘게 피우고 졌고, 폭우가 휘몰아쳤으며, 햇살은 강렬했다.
나는 어르신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쪽파와 답례로 드린 고구마와 사탕 얘기를 꺼낸다. 어르신 표정이 생생해진다. 기억이 되살아난 어르신은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가잔다. 나는 논문을 쓴다며 이틀을 날밤을 세고 입안이 헐어 무얼 먹기도 힘들고 어디를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절한다. 그래도 어르신이 또 권한다. 나는 또 거절한다. 어르신이 내 앞으로 손을 내민다. 고추 네 개가 들렸다. 이거 잡솨, 그러신다. 봄철에는 주머니에서 커피맛 사탕 네 개를 꺼내 주시더니 이번에는 싱싱한 고추 네 개를 건네주신다. 어르신은 자신의 텃밭에서 딴 고추를 길 오는 내내 꼭 쥐고 계셨던 것이다.
고추를 손에 받아 쥐고 어르신과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바로 아래에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산책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모녀다. 이분들도 봄철에 만나고 여름 내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가을로 들어서 한날한시에 이렇게 반가운 이웃들을 한꺼번에 보다니. 별일도 다 있다.
따님의 어머니가 나를 금새 알아보고 아주 반긴다. 내가 산책길에서도 안 보여, 우리 집 창을 몇 번인가 보러 갔는데 매 번 닫혀있었다는 것이다. 왜 통 볼 수 없었냐며 궁금해하신다. 나도 아주 많이 궁금해했었다. 산책하다가도 이분들이 어디 계실까 하여 주위를 둘러보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분들도 날 찾고 있었다니 반가운 일이다. 감사한 일이다.
봄철, 잘 아는 동화작가 선생님이 두유를 한 상자 보내신 적이 있었다. 엄청나게 큰 종이팩에 얼마나 많기도 한지. 주인어른께 두 팩 드리고, 옆집분께도 드리고, 여분으로 남겨두고 그래도그래도 내게는 너무 많았다. 나는 경험치로 알고 있었다. 당장은 하루에 한 팩 다 먹어도 맛있겠지만, 어느 정도 먹고 내게 부족했던 영양소가 채워지면, 하루 한 잔으로 족할 것이란 걸. 그 하루의 한 잔도 뜸해질 것이란 걸. 그럼 지금 당장 필요한, 또는 필요할지도 모를 누군가와 신선할 때, 싱싱할 때, 바로 그 때 나누는 게 좋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쪽파를 주신 어르신께 답례로 드린 고구마도 동화작가 선생님이 보내주신 것이었다.
봄철 모녀와 마주쳤을 때가 바로 그날이었다. 동화작가 선생님이 검정콩 두유 한 상자를 보내주신 날이었다. 이분들이 어딘가로 멀리 산책을 나가셨다가 내가 봄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던 벤치로 잠시 쉬러 오셨다. 벤치 언덕배기 아래에 하얀 앵두꽃이 막 지고 파란 열매가 송송이 열렸고, 보라빛 제비꽃이 발밑에 피어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앵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나는 모녀에게 두 분을 자주 본다며 어디까지 가셨다가 오시느냐고 물었다. 그림책 작가 키티 크라우더의 <아니의 호수>를 보면서 매번 같은 시각에 어딘가를 갔다가 같은 시각에 돌아오는 모녀를 눈여겨보았었다. 그때 검정콩 두유를 드시겠냐고 여쭙고, 그들에게 우리 집을 알려드리고, 방금 전에 친구가 보내준 거라고 말씀드렸던 것이다.
우리는 사는 곳도 바로 이웃해있었다. 그런데도 동네에서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마트에서도, 길가에서도. 어머니 쪽이 건강이 안 좋아 산책을 자주 한다는 거였다. 그때 따님이 어머니와 함께 영화관에 간 경험을 즐겁게 얘기해줬었는데, 이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 초입에 두 분을 다시 만났다.
나는 혹시 창문이 닫혀있더라도 집에 있을 때가 많으니 현관문을 두드려 주시라고 말씀드리고 헤어졌다.
여름을 뛰어넘고 선선한 가을 공기가 가득한 날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이 여름을 보내고, 각자의 여름을 간직한 채, 그렇게 가을 입구에서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