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였다. 우리들이 모두 좋아하던 담임 선생님이 한 달도 안돼 그만두고 젊고 날씬하고 예쁜 선생님이 담임을 맡게 되었다. 나는 키가 작아서 매 번 맨 앞 줄에 앉았는데, 내 앞으로 보이는 풍경은 칠판과 선생님뿐이었다. 누군가와 소통할 때 옆 친구나 뒤에 앉은 친구와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업시간에 내가 자꾸 뒷자리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나 보다.
보다 못한 선생님이 나를 맨 뒷자리로 이동시키셨다. 가보니, 모두 키 큰 애들이라 이제 막 중 3에 올라간 작고 작은 나는 마치 숲 속에 들어가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칠판은 아득하게 멀고 멀었고 키 큰 선생님마저 희미했다. 맨 앞자리에만 앉다가 평생 처음 맨 뒷자리에 앉았으니 모든 게 신기하고 모든 게 얼떨떨하기만 했다.
앞자리에 앉았던 나는 아무래도 조잘조잘 말이 많았었나 보다. 그도 그렇다. 학교에는 또래 친구들이 수두룩하고 하루하루 배우는 것도 많고 눈뜨면 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니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내가 맨 앞에서 해도해도 너무 떠들어대니 다른 애들에게 방해가 되고 집중을 흐트러뜨려서 그랬던 건 아닌가 싶다.
키 작은 내가 언제 뒷좌석에 앉아볼 수가 있겠는가. 이리된 거 여기서 재밌게 놀아야지 싶었다. 웬걸, 키 큰 애들이 말이 없다. 키 큰 애들이 넘 조용하다. 과묵한 키 큰 애들은 옆 친구랑도 앞 친구랑도 뒷 친구랑도 말을 않고 그저 묵묵히 책을 보고 있다. 그러니 나 같은 이방인과 말을 섞겠는가.
무슨 책인가 보았더니 하이틴 로맨스다. 이런 장르가 다 있구나. 새로운 세계다.
맨 뒷좌석에 앉은 나는 뒤를 돌아보면 벽뿐이고, 처음 경험해 본 앞자리 친구들은 상대를 해주지도 않고 칠판까지는 멀고 먼 숲 길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나 또한 이 새로운 장르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아, 세상에 이런 판타지도 또 없다. 각종 하이틴 로맨스란 로맨스는 다 읽어봤다. 우리 집에는 여태껏 하이틴 로맨스 책이 한 권도 없는 걸 보면 이때 난 친구들에게 모두 빌려본 것이다. 난 정말 넉살 좋은 아이였나 보다. 이 추억을 통해 새삼스럽게 나를 알아간다.
키 큰 중학교 때 친구를 이때 만났다. 이때의 만남 덕분에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친구네 집에 놀러 가 1박을 하며 담임 선생님들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때의 기억을 소환한다. 갑자기 날 맨 뒷 자리로 보내준 선생님이 고맙다. 덕분에 새로운 풍경을 보았고, 이 시기에 원 없이 하이틴 로맨스를 읽었고, 지금껏 친구와 세월을 같이 하고 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