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의 시에 김환영이 그린 그림책《강냉이》는 한·중·일 ‘평화그림책’으로 기획한 그림책 중 한 권으로 2015년에 나온 뒤, 표지 바탕색을 바꾸고, “인진내키만춤컸다”그림 장면을 수정하고, 판형을 키워 2018년에 다시 나왔다. 초판본과 또 달라진 점은 손글씨체로 쓴 시의 배치이다. 전쟁의 참혹함은 모든 생명의 일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에 있는데 그림책 작가 김환영은 권정생의 시를 바탕으로 그 참혹함을 선명하게 시각화한다.
권정생의 시《강냉이》는 시의 화자인 주인공 소년이 피난길에서 형과 엄마랑 함께 집 모퉁이에 심어 두고온 강냉이를 떠올리는 독백조의 시이다.
그림책에서 집 모퉁이에 심은 옥수수를 두고 떠나며 소년과 형은 손등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훔친다. 이때 쓰인 “모퉁이 강낭은 저꺼짐 두고”라는 시구는 마지막 부분의 회상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소년은 강냉이를 집모퉁이에 저희끼리 두고 떠나온 것을 피난길 내내 괴로워하는데, 그림책에는 소년이 두고 온 ‘저희끼리(저꺼짐)’를 옥수수만이 아닌 집에서 키우던 흰 강아지, 샛노란 병아리들도 함께 그린다. 동물이나 식물 등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그리는 방식은 같은 작가, 같은 화가의 작품인 《빼떼기》(권정생 글, 김환영 그림, 2017, 창비)에서도 되풀이된다.
그림책에서 클라이맥스는 피난길에서 밤을 맞아 고향집에 두고 온 강냉이를 떠올리는 소년의 상상 장면일 것이다. 소년은 형이 구덩이를 파고 자신이 강냉이 씨를 떨어뜨리고 엄마가 흙을 덮어 자신의 키만큼 쑥쑥 자란 옥수수를 별빛 빛나는 검푸른 밤에 생각한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소년의 생각 속에 처음 그려지는 강냉이는 이처럼 파란 잎과 줄기가 싱싱하게 뻗친 별빛 만큼이나 빛푸른 초록 강냉이다. 강냉이를 생각하는 소년의 얼굴과 팔다리도 강냉이와 같은 초록색이 되어간다. 강냉이가 소년이고, 소년이 강냉이가 되는 순간이다. 계속해서 소년은 생각한다.
인지쯤 샘지 나고
알이 밸낀데…….
화가는 전쟁의 참혹함을 샘지(수염)가 났을 때의 강냉이의 모습(“인지쯤 샘지 나고”)과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간 뒤의 알이 밴 강냉이의 모습(“알이 밸낀데……”) 두 장면에서 리얼하게 시각화한다. 이제 막 수염이 나고 알이 밸 찰나에 꺾여버린 강냉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하다. 전쟁의 참혹함은 한밤중 짐뭉치에 기대어 생각에 빠진 소년의 회한과 불안이 빨간 핏물로 튀고, 새카만 검정물로 뚝뚝 떨어지는 이 두 장면에서 최고조로 치닫는다. 전쟁으로 유린된 소년의 내면 상황은 강냉이의 모습을 통해 표현된다.
전쟁의 참혹함은 《강냉이》에서는 농작물, 《빼떼기》에서는 가축을 통해 그려지는데 이는 일상의 상실과 더불어 트라우마로 기억된다. 애착을 갖고 함께한 동식물과의 이별은 그 자체로도 큰 상실감을 주는데 전쟁으로 인한 상실과 아픔은 어떠하겠는가.
이처럼 전쟁의 참혹함은 우리 인간들의 일상뿐만이 아니라, 동식물의 일상도 한순간에 망가뜨린다. 자연 속에서 동식물은 아이들의 삶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 활발한 움직임과 성장이 아이들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동식물 중에서도 특히 집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반려견이나 가축, 내가 공들여 기르고 자라 다시 나의 생명 에너지로 환원되는 농작물은 더욱더 각별하다.
알이 꽉찬 강냉이를 이마 위에 올려놓고 강냉이 알 같은 콧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그림책 표지에 그려진 주인공 소년의 모습은 그림책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그려진다. 소년은 끝내 잠들지 못하고 별 하나 없는 캄캄한 밤 하늘을 올려다보며, 집 모퉁이에 저희끼리만 두고온 강냉이 생각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소년은 칠흑같은 밤만큼이나 단단한 검은 눈동자를 땡그랗게 뜨고 푸르게 영근 강냉이 생각을 이어간다. 마치 전쟁이라고 하는 무참한 폭력으로 인해 파괴된 자신의 일상을, 푸른 강냉이를 다시 되돌려놓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런 의미에서 연둣빛 표지와 뒷표지의 연두빛 바탕색(2018년판)은 새로운 생명력의 복원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전쟁의 참혹함, 폭력성은 소년에게 강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심은 ‘강냉이’의 안위를 걱정하는 소년의 깊은 마음까지는 해치지 못한다. 그림책 《강냉이》는 전쟁의 참혹함과 함께 절대로 상실해서는 안되는 ‘강냉이=초록=생명’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며, 강냉이를 통해 보호받아야 마땅한 어린시절의 복권을 그리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