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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랑 Sep 18. 2023

저녁으로 먹을 애기 고추를 얻으며

하루와 하루 사이


저녁 무렵 마트에 들러 물도 사 오고 산책도 다녀올 겸 집을 나섰다. 길가에 핀 분꽃 구경을 하고 바닥에 떨어진 분꽃 씨앗을 주워 산책로로 향하는데, 어느 빌라 작은 담 너머로 고운 청록빛 옷을 입은 할머니 모습이 살짝 보였다.


예전에 쪽파를 나누고 고구마를 나누었던 구순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다. 인사를 건네며 제가 그때 그 사람이라고 설명하자 기억을 떠올리며 반가워하신다.


그러더니 애기 고추를 좀 줄 테니 빌라 공터로 들어오라고 손짓하신다.


빌라 공터 벽에는 커다란 화분들이 주루룩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가꾼 고추가 나무처럼 무성했다.

할머니가 키운 고추나무는 모두 다섯 그루였는데, 작고 고운 애기 고추를 한 손 가득 따서 내게 건네며 장에 찍어 먹으면 맛나니까 저녁으로 먹으라며 계속 따서 주신다.

잘 큰 할머니 고추나무 옆에 놓인 빈 화분들이 눈에 띄어 "모두 할머니 화분이에요?"하고 묻자 "아픈 할머니들 것인데, 나한테 뭐라도 심으라고 해서, 무라도 심으려구."하신다. 아, 빈 화분들은 아프신 다른 할머니들 것이로구나.

올 7월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적전까지도 자신의 밭에 들깨모종을 심어놓았었지.


할머니가 고추모종 3000원에 샀다고 말씀하신다. "모종 하나에 3000원요?" 하고 묻자, 이렇게 고추나무가 큰 것은 정월부터 씨를 뿌려 모종을 키운 덕분이지, 본인이 화분에 그냥 씨를 뿌려서는 이렇게 자라지 않는다며, 좋은 모종이라 제값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할머니 말씀을 들으며 나도 제값을 다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어디, 길가에서 만난 할머니가 준 애기 고추로 저녁 한끼를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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