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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랑 Aug 01. 2018

<동화로 떠나는 내면 여행-일본동화읽기➁>



 아빠라는 이름이 주는 ‘악몽’과 ‘공포’
『아빠가 많아졌다』(미타무라 노부유키 글, 사사키 마키 그림, 김버들 옮김, 한림출판사, 2011)

    

                                                                       
1. 아빠와 아들을 그린 이야기 

   한국에 번역된 일본 동화 중에 『아빠가 많아졌다』(미타무라 노부유키 글, 사사키 마키 그림, 김버들 옮김, 2011)란 책이 있다. 이 책은 다섯 편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꿈에서 만나자」,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길」, 「나는 5층에서」, 「아빠가 많아졌다」, 「벽은 알고 있다」이다. 이 작품들은 무의식의 세계를 담고 있다. 전자인 세 편의 글은 화자인 소년(아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이다. 후자인 두 편「아빠가 많아졌다」와 「벽은 알고 있다」는 아빠와 아들 이야기를 전면에 담고 있다. 




  『아빠가 많아졌다』에 들어있는 다섯 편은 1960년대 중반 무렵 잡지에 연재되어 십 년이 지난 1975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동화집으로, 한국에는 2011년에 번역되었다. 일본 현대 아동문학 평론가이자 작가인 우에노 료(上野暸)는 이 책을 ‘전위적 작품’, ‘모험적 작품’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이 오싹한 이야기는 단순한 악몽이 아니다. 꿈의 형식을 빌려 그려진 현대인의 존재의 불확실성이다. (…) 번영과 평화의 바로 뒤쪽에 들러붙어 있는 현대인의 불안을 그려내고 있다.(「おとうさんがいっぱい」, 『日本児童文学100選』, 偕成社, 1979, p288-289) ”라며 현대라고 하는 발판 위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든 어린이, 어른이 당면한 불안 심리를 담은 책으로 보고 있다.  

  

2. 집을 찾아 헤매는 아들

   첫 번째 이야기인 「꿈에서 만나자」는 꿈을 꾸는 미키오 소년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년은 꿈속에서 집 앞에 서 있다. 이 집은 낯이 익지만 누가 사는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소년은 자신이 왜 이 집 앞에 서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집 안으로 들어간 소년이 목격한 장면은 아기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대여섯 명의 한 가족이다. 하지만 미키오를 발견한 아빠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미키오는 다음날에도 꿈속에서 그 집을 찾아간다. 어제의 갓난아기가 다섯 살 정도의 아이로 자란 것을 알게 되지만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자신이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식으로 미키오 소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미키오 소년이 꿈을 통해 자신의 갓난아기 시절로 되돌아 간 것, 자신의 집을 되풀이하여 찾아간 점일 것이다. 이는 성장기의 기로에 선 소년이 자신이 실제로 겪어왔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내면 여행과 방황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작별을 고하는 ‘이별’ 의식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두 번째 이야기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길」은 ‘나’라는 화자가 역에서 항상 다니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집을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을지 불안 해 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길을 걷고 도착한 집에는 엄마와 아빠 대신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해파리처럼 생긴 흐물흐물한 이상한 물체가 있을 뿐이다. 집에서 뛰쳐나온 ‘나’는 처음 출발했던 역으로 다시 가 이번에는 평소대로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간다. 하지만 있어야 할 곳에 자신의 집만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다. 네 번째 시도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집 앞에 도달한 ‘나’는 이번에는 부모가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부모를 마주한 현관 앞에서 ‘나’ 또한 다리가 녹아내리며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해진다.     
   앞서 살펴본 첫 번째 이야기 「꿈에서 만나자」의 미키오 소년보다 조금 더 성장한 듯한 이 이야기의 화자 ‘나’의 방황은 지금까지 습관처럼 행했던 일상적인 삶이 아닌 스스로가 주체로 서기 위한 모험과 시도로 보인다. 「꿈에서 만나자」에서 미키오가 자신의 근원이 되는 ‘집’으로의 회귀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거쳤다면,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길」의 ‘나’는 이제까지의 삶을 해체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나의 길, 새롭게 구축해야 할 나의 집 찾기 이야기로 읽힌다.   



          
  세 번째 이야기 「나는 5층에서」에서는 집 자체가 주인공 같은 이야기이다. 나오키라는 소년의 집은 부모가 맞벌이를 한다. 나오키는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견딜 수 없이 싫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키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상한 상황에 봉착한다. 집 안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나오키는 자신의 집이 있는 5층을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집이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집이 아닌 다른 공간에 갇히고 만다. 자신의 집이지만 다른 공간에 고립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나오키 소년이 고립된, 집 속의 또 다른 공간이다. 집 속의 이 공간은 소년 안에 내재한 것으로 외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 소년 스스로가 만들어 냈음을 알 수 있다. 소년이 만들어낸 이 공간이 소년에게 공포로 남을지 무한한 창조력의 원동력이 될지 모두 소년에 달려있다.   
  이들 세 편의 이야기는 마치 ‘집’이라는 공간에서 아빠와 아들이 대면하기 전의 아직 시작되지 않은 전초전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지금부터 우리가 만나게 될 아빠와 아들이 벌이는 무의식의 세계로 우리들을 안내하는 입구 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3. 늘어난 아빠로 인한 ‘악몽’

  지금 이 글 주제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네 번째 이야기인 「아빠가 많아졌다」는 어느 날 갑자기 도시오네 아빠가 세 명으로 늘어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하지만 이러한 이변은 도시오네 집만이 아닌 사촌 미미코네 집에서도, 동네 다른 집에서도, 같은 반 친구네 집에서도 일어난다. 심지어 아빠가 열 사람으로 늘어난 집도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소년 도시오는 늘어난 세 아빠를 ‘1번 아빠’, ‘2번 아빠’, ‘3번 아빠’로 부른다. 드디어 당국에서 진짜 아빠를 결정하기 위해 도시오 집에 조사관을 파견한다. 그리고 진짜 아빠가 누구인지를 판정하는 결정권을 도시오가 맡는다. 세 명의 아빠는 마치 선거 연설을 하듯 앞으로 어떤 아빠가 될 것인가를 밝힌다. 


사다리타기 결과가 나왔다. 나는 재빨리 한번 훑어본 다음에 얼른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
조사관에게 사다리타기의 결과를 작은 소리로 말해 주었다. ‘이유는?’이라고 조사관이 물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곧, ‘같이 살기가 제일 편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해 주었다. 조사관은 ‘확실하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거지?’하고 거듭 확인했다. 나는 ‘예’라고 대답했다. (「아빠가 많아졌다」, p137)
 


   도시오는 세 아빠 중에 한 아빠를 고르는 것을 사다리타기를 통해 결정한다. 이렇게 선택된 아빠만 ‘새가정조직위원회’에서 주는 ‘인증서’를 받아 집에 남고 두 명의 아빠는 집 밖으로 끌려나간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사건이 무난하게 일단락되며 끝날 것만 같다. 도시오는 지금까지의 사건을 하나하나 노트에 정리하며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이젠 절대로 그런 괴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갔다. (…) 아무튼 지금은 어느 집이든 아빠는 한 명뿐이다. 원래 그랬으니 이런 상황이 뭐 특별한 것도 아니지. 지금까지처럼 살면 된다. 그런데 일부러 그 악몽을 떠올리는 바보는 없다.(p142-143)”라며 마음을 추스른다. 하지만 역시 이 상태로 이야기가 끝나면 뭔가 찜찜하다. 아니나 다를까, 대반전이 대기하고 있다.

 

이걸로 끝이다. 모든 게 끝났다. 그 모든 악몽은 이제 안녕, 정말 안녕.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온 모양이다.(…)
도시오는 기분 좋게 현관으로 나갔다. 한 소년이 고개를 숙인 채 신발을 벗고 있었다.
“누구세요?”
소년이 얼굴을 들었다. 순간, 도시오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도시마 도시오’가 눈앞에 서 있었다. 마루 끝에 한 발을 걸치고 입을 딱 벌린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도시오를 응시하면서. (「아빠가 많아졌다」, p144)


   아빠에게 일어났던 괴현상이 이제 그 아들인 도시오에게 되풀이되는 장면이다. 아빠가 늘어나 벌어진 소동을 소년 도시오는 ‘악몽’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다른 누구에게 판정받아야만 하는 어쩌면 더 센 ‘악몽’ 앞에 맞닥뜨려진 것이다.
   가끔 어떤 사람들로부터 눈코 뜰 새가 없을 정도로 바빠, 본인이 한 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효율적인 시간 활용, 확장되는 능률, 그로 인해 생기는 여유와 휴식 등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지금의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기에 또 다른 내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은 나한테는 악몽이고 공포이다. 그래서 그런지 꿈속에 내가 직시하지 못하는 내가 또 다른 모습으로 투사되어 등장할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고 그로 인해 종종 악몽과 공포에 시달린다. 때때로 나한테는 나 자신이 바로 악몽과 공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익히 잘 쓰는 말 중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사자성어를 떠올려본다. 지나침은 부족함과 마찬가지란 뜻으로 중용을 중시한 말인데 이 말과 더불어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표현도 있다.「아빠가 많아졌다」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늘어나는 괴현상은 아빠와 아들에게서만 발생한다. 엄마에게는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보이는 엄마의 모습은 다소 무기력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면에서 이 이야기는 여성성이 약화되고 남성성이 강화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균형이 흐트러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남성성을 양(陽)의 기운, 강(强)의 상징으로 볼 때 주역(周易)에서 28번 택풍대과(澤風大過) 대과괘(大過卦)가 떠오른다. 

  『주역전해』(김경방‧여소강 지음, 안유경 역주, 심산, 2013)에 따르면 “대과는 양이 지나친 것이다. 양을 크다고 하기 때문에 양이 지나친 것을 ‘대과’라고 하였다.(p230)”라며, 특히 대과괘의 3효를 들어 “마룻대가 휘니 흉하다.(…) 마룻대가 휘어서 집이 기울거나 무너지는 것과 같다.(p500)”라고 설명하며 , 총론에서 아래와 같이 풀이한다.    


대과괘는 고대의 정치사회 속에서 항상 보이는 ‘강’이 지나친 현상을 추상화하여 그것에 보편적 이론의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다. (…) 마룻대가 휘는 것은 일종의 매우 위험한 사회 형세로 이해할 수 있다. 군주가 지나치게 강하고 신하가 약하거나, 윗사람이 지나치게 강하고 백성이 약하거나, 정치가 지나치게 강하고 경제가 지나치게 약한 것은 모두 마룻대가 휘는 말 속에 포함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면 또한 평온한 것 같으나, 실제로 위기가 가득 차서 사람을 질식시키는 형세이다.( 『주역전해』, p505)    


  따라서 「아빠가 많아졌다」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많아지는 현상은 집이 붕괴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벽으로 들어간 아빠가 야기하는 ‘공포’

  집이 무너지는 상황은 실제로 그다음 이야기에서 현실화된다.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인 「벽은 알고 있다」는 벽 속으로 들어갔다가 종국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아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년 가즈미의 아빠는 엄마와의 부부 싸움이 발단이 되어 벽 속으로 잠적한다. 벽 속으로 들어간 아빠는 아들 가즈미에게 자신이 ‘4차원 벽’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신문을 읽어 달라, 주간지와 책을 읽어 달라, 자신이 지은 시를 대필해 달라며 4차원의 공간 속 벽에서 유유히 반년을 지낸다. 심지어는 아들에게 자신의 인생사까지 대필시킨다.
  이렇게 벽을 사이로 두고 함께 살아갈 것 같은 아빠와 아들에게 또 다른 위기가 닥친다. 가즈미네 집이 재건축에 들어간 것이다.


가즈미도 처음에는 기뻤다. 벽을 허물면 아빠를 구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일은 불가능할 거라고 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있는 곳은 벽 저편에 있는 공간의 틈새 같은 곳이란다. 만약, 벽이 무너지게 되면 그 틈에 변화가 생겨서 아빠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게 될 거야. 다시 말하면 아빠는 너희들이 있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는 거지.” (「벽은 알고 있다」, p198)


  아빠는 우발적으로 벽 속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덤덤하게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어진 삶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이러한 순응적인 태도가 조금은 무섭기까지 하다.    
  「벽은 알고 있다」의 주인공 가즈미 소년은 「아빠가 많아졌다」의 도시오 소년과 달리 아빠의 부탁을 들어주고, 아빠를 염려한다. 하지만 「아빠가 많아졌다」에서 아빠에게 일어났던 현상이 아들에게 되풀이되었던 것처럼 「벽은 알고 있다」에서 아빠에게 일어났던 현상이 아들에게도 되풀이된다. 아들은 새로운 집, 새로운 가정에서의 출발을 앞에 두고 갑자기 혼자의 삶을 선택한다. 아빠와 마찬가지로 우발적이고 충동적이다. 단지「아빠가 많아졌다」와 다른 점이 있다면 「벽은 알고 있다」의 가즈미는 자신의 의지로 엄마와의 이별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꾸리는 엄마에 대한 반발심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너무 성급하다. 


엄마는 정말 아빠를 잊는 걸까? 엄마의 머릿속은 이제 꿈에 그러던 새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로 가고 싶다. 세상이 이렇게 넓으니 분명 어딘가 어린이도 혼자 살 수 있을 만한 곳이 있을 거야.’(…) 엄마는 눈치채지 못했다. 가즈미는 그대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아아, 날씨 좋다. 이런 날엔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정말 드물게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다. (「벽은 알고 있다」, p206-207)


  어찌 되었거나 아빠는 ‘벽’ 속으로 잠적했지만, 가즈미는 ‘세상’이라는 세계로 나아간다. 하지만 소년이 향한 그 세상 속에서 ‘벽’에 직면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이야기 중 『열네 살』(다니구치 지로 지음, 양억관 옮김, 샘터, 2004)이라는 만화가 떠오른다. 이 만화는 중년의 회사원이 출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겪게 되는 내면 여행을 담고 있다. 주인공 중년 남성은 14세 때 모습으로 되돌아가 자신의 가족과 대면하고 중학교 시절을 재 체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심층 심리에는 과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의 실종이 자리 잡고 있다. 도쿄에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회사원의 내면에는 이처럼 아버지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공포 체험이 내면 현실로 내재하고 있다가 중년 남성의 건강에 적신호를 보내며 그를 판타지 공간으로 이끈다. 그곳에서 이 중년의 남성은 자신의 근원적인 공포와 불안에 대면하게 된다. 

  「벽은 알고 있다」 또한 만화 『열네 살』과 마찬가지로 아빠가 어디론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불안을 넘어서는 ‘공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열네 살』의 경우는 「벽은 알고 있다」의 아빠처럼 충동적이 아닌 내적 동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벽은 알고 있다」의 우발적이라 할 수 있는 아빠의 사라짐은『열네 살』의 공포보다 더 공포스럽다. 

     

5.  ‘악몽’과 ‘공포’에 대면하기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세 편의 글과 아빠와 아들 관계에 천착한 「아빠가 많아졌다」,「벽은 알고 있다」에서는 모두 ‘집’이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전자 세 편의 이야기 속에서의 소년들은 ‘집’으로 인해 방황하고, ‘집’을 찾아 헤매고, ‘집’에 갇힌다. ‘집’은 끊임없이 소년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한편으로는 괴기 영화 같다는 생각조차 들게 한다.       


                              
  카를 융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 속에서 꾸는 꿈이라고 하는 무의식 세계에 나타나는 집은 나 자신의 마음을 상징하거나, 나의 내면세계, 나의 인격을 상징한다. 또 그러한 집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공간은 나의 잠재된 가능성을 상징한다.  한편 지금 내가 받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의 집은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첫 번째 세계가 되는 가족이 함께 기거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동화집 『아빠가 많아졌다』에 표현된 집은 어떠할까. 『아빠가 많아졌다』에서의 집은 나의 안식처이고, 나의 근원이고, 내가 회귀하는 방황의 귀결점이고, 악몽의 근원지이기도 하며, 나를 외톨이로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안과 공포를 주는 곳이기도 하고 내가 은둔하게 싶게 만드는 곳이며 그곳을 부수고 나오고 싶게 하는 곳으로써 ‘집’은 등장한다. 

                                         


   
  후자에 해당하는 두 편 「아빠가 많아졌다」, 「벽은 알고 있다」의 아빠와 아들은 ‘집’에서 대면하고, 아빠는 아들들에게 악몽과 공포를 야기시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문제는 악몽과 공포라고 하는 아빠 자신이 떠안아야 할 자신의 그림자를 아들에게 투영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두 이야기에서 아빠가 보여주는 악몽과 공포는 무책임하고 충동적이다. 여기서의 아빠는 갑자기 늘어났다가(「아빠가 많아졌다」), 갑자기 사라진다(「벽은 알고 있다」). 보통 옛이야기에서 등장하는 형제나 자매, 또는 계모는 성장기를 통해 거치면서 보이는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거나 인격이라고도 해석하는데, 「아빠가 많아졌다」나 「벽은 알고 있다」에서는 이러한 해석보다는 ‘갑자기 많아지고 갑자기 사라지는’ 극단적인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아빠의 악몽과 공포는 다시 아들들에게 대물림된다. 이를 통해 아빠와 아들의 세계가 근원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자인 내가 이들 이야기에서 느끼는 악몽과 공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들들이 다시 자신의 ‘집’을 확보했을 때 자신들이 겪은 과거의 ‘악몽’과 ‘공포’를 이제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대물림하지는 않을까 하는 악몽과 공포 말이다. 대물림되는 것이 ‘정’, ‘배려’, ‘용기’, ‘재능’, ‘활기’와 같은 덕목이라면 걱정 없다. 하지만 대물림되는 것이 혹여 미숙함에서 기인한 극단적인 ‘악몽’과 ‘공포’의 기억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에너지가 자각되지 못하고 무의식과 연결되어 외부나 타자로 분출될 경우 그 폐해는 이루 짐작하기 힘들다. 

    


                                                   
  따라서 혹여 현실이라고 하는 일상 속에서 나의 미숙함으로 인해 지금 내가 야기시키는 악몽과 공포스러운 상황이 존재한다면 지금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내 아들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에까지 미칠 수도 있는 폐해임을 자각해야 한다. 고도 경제성장기의 한 복판이라고 하는 양의 기운과 강이 팽배했던 1965년에서 1975년 사이에 나온 일본의 이 한 편의 동화집은 2011년 한국에서 번역되어 지금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경종을 울려오는 듯하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카를 구스타프 융, A 야페 편집, 조성기 옮김, 김영사, 2007)에서  융은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14p)”라고 말한다. 

  어느 의미에서 동화집 『아빠가 많아졌다』는 작가의 내적 체험을 작품화하였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꿈이라는 장치를 활용하여 자신 안에 내재한 악몽과 공포와 대면하고 해소하여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발 딛고 살아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대면한 악몽과 공포는 내 안에서 새로운 힘으로 변환되어 발산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카를 구스타프 융 편, 이부영 외역, 집문당, 1983)에서 융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어떤 변화가 어디서든 시작되어야 한다고 볼 때 그 변화를 체험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수행해 나가는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다. 변화는 실로 한 개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하는 사람이 우리들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좋은 것이다.(『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p103)


  ‘변화는 실로 한 개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좋다. 그렇다, 난 여기에 있는, 존재하는 하나의 개인이고 현실이다. 어렵고 힘들지만 내면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동화’나 혹은 ‘꿈’의 힘을 빌려 나라는 개인부터 실행해 옮기고 싶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참 어렵고, 잘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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