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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랑 Aug 29. 2018

<동화로 떠나는 내면 여행-일본동화읽기⑥>

        

         사자(死者)가 내 곁에 머무를 때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사사키 히토미 지음, 최정인 그림, 고향옥 옮김, 우리교육, 2011)      



1. 그 사람이 여기에 있다     

  살면서 가끔 ‘지금 여기에 그 사람이 있는 것 같아’란 느낌이 든 적 없을까. 여기에서의 그 사람이란 내 곁에 있다 먼저 떠난 사자(死者)를 가리킨다.


  건강한 애도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풀어 가면, 그 사람은 죽고 없지만 내 곁에 있다. 물론 이러한 심리 상태는 내가 그들을 불러들였을 수도 있고, 또 누가 알랴, 그들이 정말 어느 순간에 문뜩 나를 찾아왔을지도. 그 순간을 내가 함께 했을지도. 어느 날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뜬금없이 내 꿈속으로 찾아왔을 때도 이런 순간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사사키 히토미 지음, 최정인 그림, 고향옥 옮김, 우리교육, 2011)는 초등학교 4학년 다케시라는 소년과 오랫동안 병을 앓다 죽음을 맞이한 옆집 할아버지가 나누는 심적 교류를 담았다.      

   

2.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다 

  다케시와 옆집 할아버지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다케시는 옆집 할아버지를 친할아버지 이상으로 좋아하고 따른다. 농부인 할아버지는 한창 일할 때인 사십 대에 뇌경색을 일으켜 쓰러진 뒤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다 집에서 숨을 거둔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그래도 할머니와 둘이서 열심히 농사일을 한 모양인데,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또 다른 병에 걸려서 거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15)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에서 옆집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곁에서 함께 하는 할머니 그리고 가족들과 다케시를 비롯한 이웃 사람들은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영위하며 할아버지를 지킨다. 




  최근에 나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길을 선택한 이들의 간병 기록을 담은 『떠나야 하는 보낼 수 없는-집에서 죽음을 준비한다는 건』(오시카와 마키코 지음, 남기훈 옮김, 세움과비움, 2013)을 읽었다. 이 책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조금 덜 아프지 않을까요?(p80)”란 문장이 나온다. 저자인 가정 방문간호사 오시카와 마키코는 암이나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지켜보며, 그들이 “가장 편안하고 인간답게 마지막을 지낼 수 있(p129)”도록 옆에서 함께 한 여러 가족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불안과 병마로 인해 병원과 집을 되풀이하여 오가는 환자와 가족들의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방문간호사는 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울고 웃으며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던 그날은 제게 있어서도 최고의 시간이었습니다.(p118)”라고 말한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해도 우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몸이 아팠고, 작년부터는 내내 누워 지냈기 때문이다. 올 7월부터는 건강이 더 나빠졌고 일주일 전부터는 왕진 온 의사 선생님에게 매일같이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15)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에서 다케시 또한 할아버지가 위험한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 순간순간을 지켜보고, 시간을 함께 공유하며, 천천히 이별을 준비해 가는데 이러한 순간순간이 일종의 애도의 과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사자를 알아보다     

  티베트의 사생관을 담은「티베트인의 죽음과 환생」(『아시아의 죽음 문화-인도에서 몽골까지』, 소나무, 2010)에서 심혁주는, “티베트 사원에서 추구하는 가장 근원적인 공부는 죽음 과정에 대한 명상을 통해 내면세계(마음)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다.(p73)”라며 티베트 활불(活佛)의 말을 빌려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죽은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기가 어렵다고 한다. 망자의 영혼이 집 주위를 맴돌지만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한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말을 건네려 하지만 가족들은 그것을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적 죽음에 이르면 이러한 중간 상태에서 49일을 보내지만 그 업이 얼마나 축적되었는지에 따라 더 길어질 수도 짧을 수도 있다고 한다.(『아시아의 죽음 문화-인도에서 몽골까지』, p86-87)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에서 옆집 할아버지는 죽은 뒤 사자(死者)가 되어 다케시를 찾아온다


할아버지가 해 주던 무서운 이야기를 생각한 뒤라 갑작스러운 소리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쭈뼛쭈뼛 얼굴을 들자 눈앞에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안녕이라잖아, 안녕!”

그 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히죽히죽 웃으면서 다시 인사했다.

“아, 안녕!”

얕보이면 큰일이다. 나도 가능한 뻣뻣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모르는 아이다. 아마 장례식에 온 할아버지의 친척 아이일 것이다.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52)     


  할아버지의 혼령과 다케시의 마음이 접촉하며 할아버지는 소년 시절 때의 몸과 정신을 획득한다. 하지만 앞서 심혁주의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무나 사자와 접촉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 동화에서 할아버지의 소년 시절 모습을 ‘본’ 사람은 다케시 말고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다케시만이 할아버지의 혼령을 살아있는 실체로 발견하고 알아본 것이리라.  


4. 사자와 놀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당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집 안 사람 모두 분주히 움직이지만, 정작 다케시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집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엄마한테 한 소리(p47)”를 듣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쓰는 농기구며, 장난감 등을 놓아두는 헛간으로 피신한다. 


“다케시, 거치적거리니까 어디로 좀 가!”

그 목소리가 보통 때와 다르게 째진 소리로 쨍쨍 울렸다. 이럴 때는 엄마 말을 거스르지 않는 게 좋다. (…)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갔고 더구나 아직 오전이기 때문에 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나는 저녁때까지는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 없었다.(『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52)  

   

  심심하고 외로울 때 사람은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갈망하게 된다. 이런 다케시 앞에 죽은 할아버지는 ‘히사오’라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다케시는 히사오와 함께 달리기를 하며 논다. 다케시는 달리기를 잘한다. 하지만 언제나 2등이다. 1등은 같은 학년인 다쿠야라는 소년이다. 다케시는 다쿠야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아무리 열심히 달리기 연습을 하고, 소질도 있지만 다쿠야를 대적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또 다른 제3의 인물인 다쿠야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쿠야는 빠르다. 엄청 빠르다. 4학년에서는 언제나 큰 차이로 일등이다.

사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다쿠야의 집은 학교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진 후지사카라는 마을에 있다. 크로스컨트리 코스 같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은 길을 3학년 때도 4학년 때도 걸어 다녔으니 하반신이 단련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실제로 다쿠야와 같은 마을에서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각 학년에서 발 빠르기로 1,2등을 다투었다.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60-61)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은 길’을 일상처럼 다니는 다쿠야를 어찌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우리들의 주인공 소년 다케시는 ‘히사오’라고 하는 특별한 존재를 알아본다.     

 

“땅!”

나는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숨에 가도바 고갯길을 뛰어 내려갔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발이 꽤 빠르다. 다쿠야만 없으면 달리기는 내가 우리 학년에서 일등이다. 적어도 이 다카하라 지구 4학년 중에서 내 앞을 가로막는 녀석은 없다.

그런데.

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히사오는 너무 쉽게 나를 쫓아왔다.

“다케, 느려.”

그러면서 내 옆을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이름을 막 부르냐!’

발끈해서 쫓아가려고 했지만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히사오는 아무튼 빨랐다. 빠를 뿐 아니라 자세도 좋았다. 발놀림도 가벼웠고, 발끝은 아주 조금밖에 땅바닥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바람을 타고 타타타탓 경쾌하게 뛰어가는 모습은 마치 실이나 뭐가 하늘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60-61)    


  다케시 앞에 나타난 존재 히사오는 단숨에 1등 다쿠야를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벼운 몸놀림에 신통하게 발이 빠른 히사오는 다케시에게 너무 힘이 들어갔다며 힘을 빼라고 조언한다. 언제나 2등만 하던 다케시가 1등 다쿠야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냥은 다쿠야를 당해낼 재간이 없지만 그래도 다케시는 사자와 함께 놀고 사자의 조언을 들었지 않은가.

 

5. 사자가 부탁하다 

  다케시와 히사오는 달리기와 씨름을 하며 논다. 그러다 히사오는 다케시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한다. 


“다케, 보물찾기 하지 않을래?”

“보물찾기?”

진짜 엉뚱한 녀석이다.

“싫어, 귀찮아.”

나는 누운 채 대답했지만,

“하자하자.”

하고 히사오는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오래전에 굉장한 보물을 숨겨 뒀거든.”

“보물이 뭔데? 그리고 어느 정도 굉장한 건지 모르면 안 찾을래.”

“그건 찾고 나면 알 거야. 가자. 응, 다케?”

히사오는 햇빛을 등진 채 눈을 반짝거리며 웃었다.

“에잇, 할 수 없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60-61) 


  히사오는 자신이 아주 오래전에 숨겨놓은 보물이 있다며 다케시를 밭 한 구석에 있는 유자나무 아래로 데려간다. 이 유자나무는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나무다. 할머니가 밭일을 하다가 그 나무 밑에서 쉬곤(p70)”하는 특별한 곳이다. 할아버지는 다케시에게 그 나무 아래에서 캔 보물을 ‘유코’라는 여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히사오는 두 손을 나팔처럼 만들어 소리쳤다

“그 깡통, 우리의 보물이야!”

“우리?”

“유코한테 전해 줘!”

그렇게 말하고 히사오는 집 안으로 사라져 갔다.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60-61)    


  사자에게도 공짜란 없다. 사자가 다케시를 찾아온 것은 다케시에게 달리기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자 또한 ‘유코’란 사람에게 생전에 하지 못한 그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다케시를 찾아온 것이다.

  그 후 다케시가 어떤 식으로 깡통 보물을 전달할지, 깡통 속에는 어떤 보물이 들어있는지, 깡통 보물에 얽혀있는 사연은 무엇인지,  유코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여기서는 할아버지와 다케시가 보여주는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6. 제대로 통하는 순간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에서 다케시가 마주하는 존재 히사오는 죽은 할아버지의 넋이니 ‘귀신(鬼神)’에 해당한다. 죽은 사람의 넋이나 혼을 가리키는 표현에는 사자(死者), 망자(亡者), 혼령(魂靈) 등이 있다. 


 순수한 우리말 표현인 ‘넋’과 관련해서 우리 속담 중에, ‘넋이 나갔다’, ‘넋을 잃고 본다’, ‘넋이 빠졌다’ 등의 말이 있다.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에서는 할아버지의 ‘넋이 돌아온다’. 


  오랫동안 병상 생활을 하던 할아버지는 넋으로 돌아와 정말이지 실컷 달린다. 아무도 모르는 허상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넋이 달리는 모습을 다케시가 ‘본다’. 다케시라는 한 소년이 본 할아버지의 넋은 현실이 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닌 힘이 된다. 띠라서 다케시 또한 “나, 귀신은 무서운데 할아버지 귀신은 봐도 안 무서울 것 같아.(p116)”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생동하는 넋과 접촉하여 달리기 연습을 하며 함께 논 다케시의 그 후가 궁금하다.   

  

“준비…….”

준비 자세를 한다.

“땅!”

뛰어나간다.

무릎이 올라간다. 팔이 흔들린다.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인다.

야호, 신난다!

지구 대항 이어달리기도, 다쿠야와의 승부도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저 달린다. 내 발로, 바람을 가르며.

야호, 신난다! 이런 기분, 처음이다.

‘신난다!’ ‘신난다!’ ‘신난다!’

몸속 깊은 곳에서 펄떡이는 숨결이 느껴진다.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124) 


  제대로 통했다. 다케시 옆에 존재했던 특별한 존재 히사오 할아버지는 한 소년에게 좋고 신명 나는 것을 제대로 전하고 떠났다.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은 ‘해방’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카를 구스타프 융, A 야페 편집, 조성기 옮김,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p491)    


  어떤 의미에서 히사오 할아버지와 다케시는 융이 말한 것처럼 둘 다 해방감을 만끽했다고 볼 수 있다.

  히사오 할아버지는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다케시는 달리기 승부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된다. 이 순간 두 사람의 영혼은 통하고 할아버지의 건강한 영혼이 다케시로 이어진다.  


  심혁주는 티베트 불교를 예로 “모든 가르침과 수행은 결론적으로 단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마음의 본성 살펴보기, 그래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삶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이다.(p73)”라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식날인 바로 그날 히사오 소년으로 돌아와 자신의 본성대로 맘껏 달리고, 맘껏 자기 의견을 말하고, 맘껏 즐거워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유코에게 전해야 할 소중한 보물을 남기고 간다. 이러한 순간을 다케시가 함께 한다. 


  산 자나 죽은 자 모두가 적절한 애도 과정을 거친다면, 사자(死者)가 내 곁에 머무를 때, 바로 그 순간이 마법이 열리고 서로 통하는 순간이 됨을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의 다케시와 히사오 할아버지가 함께 하는 모습 속에서 조금이나마 엿본 듯하다.   


7. 해방을 맞이한 히사오 할아버지    

  농부였던 할아버지는 달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할 때 병이 찾아온다.    


“설마 하니, 그렇게 젊은 나이에 뇌경색이 올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나.”

“잊히지도 않아. 역전 경기가 끝난 그날 밤에 쓰러졌으니까. 그 사람, 마지막 ‘마을 역전 경기’ 때 다카하라 청년단 팀 감독이 돼서…….”

“그래그래, 참가자가 해마다 줄어서 역전 경기는 그 해로 끝이 나 버렸지. 마지막 대회라고 젊은이들을 모아서 아침마다 연습을 시켰어. 열심히 지도했지.(…)”(『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86-87)    

 

  마을 청년 팀에게 달리기를 지도하던 할아버지는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우승 축하 잔치를 하던 날 바로 그날 할아버지는 뇌경색을 일으키는데, 이 날은 “결혼기념일에 우승을 했으니, 오늘은 무척 기쁜 날(p104)”로 달리기 대회 우승과 결혼기념일이라고 하는 경사가 겹친 날이었다.  

  히사오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지냈는지, 어떤 생각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그 깊은 속내까지는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히사오 할아버지는 선택이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환자로서가 아닌 병을 앓고 있는 한 명의 반듯한 인간으로서 일상의 삶을 영위했다. 

  하지만 그런 히사오 할아버지에게도 죽어서까지 버리지 못한 두 가지의 미련이 있다.    


뒷집 할아버지의 말에 장례식 분위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시 웃음 소리가 왁자했다.(…)

한바탕 웃은 뒤에 또 다른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발이 빨랐어.”(…)

뒷집 할아버지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방 안은 떠들썩하던 조금 전까지와 달리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남보다 곱절이나 튼튼했던 사람이 병들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니, 퍽 힘들었을 거예요.”

“다시 한 번 달리게 하고 싶었는데.”

뒷집 할아버지가 중얼거리자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중얼거렸다.

“히사오 씨는 얼마나 달리고 싶었을까…….”

그 이름이 내 가슴에 꽂혔다.(『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83-90)    


  히사오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온 이웃 사람들은 할아버지에 대해 웃고 울며 추억한다. 이들의 말을 통해 히사오 할아버지가 ‘달리기’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음을 알게 된다. 또 하나의 미련은 앞서 언급한 ‘유코’라는 여성에게 전달하지 못한 보물이다. 


문득, 그 장면이 떠올랐다.

작년 가을, 할아버지가 쓰러지기 얼마 전의 일이다.

그날, 나는 할아버지와 툇마루에 앉아서 저녁노을이 물드는 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이렇게 괴로운 거로구나.”

할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언젠가, 언젠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나이만 먹어 버렸어.”

밭을 본 채 말했다. 눈가에 빛나는 것이 번져 갔다.

‘그래, 그때 할아버지는 분명히 ’언젠가‘라고 말했어.’

언젠가 반드시 건강해지겠지.

언젠가 또 전처럼 일할 수 있게 되겠지. 

틀림없이 할아버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 p107-109) 

 

  히사오 할아버지가 자신이 죽은 바로 그날, 친손자처럼 아끼는 이웃집 소년 다케시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이 생전 간절히 원했던 다시 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건강한 소년의 몸과 정신으로 돌아가 보물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자세히 살피지 않지만,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에는 히사오 할아버지와 유코라는 여성의 따스한 ‘러브 스토리’가 담겨있다.  


  앞서 융이 ‘해방’에 대해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라고 말한 것처럼 할아버지는 자신을 온전하게 알아봐 줄 존재 다케시 앞에 ‘소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생전에 다하지 못한 달리기와 유코라는 여성에게 보물을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이 순간이야 말로 할아버지가 해방을 맞이하는 순간이 아닐까.       


8. 그렇다고 24시간 내 곁에 머무를 리 없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동네에 존재한 여러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들이 많다. 나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만이 아닌 우리 마을 저쪽 끝에 사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 또한 내게는 친근한 존재였다. 특히 내가 살던 동네는 대문이 없거나 열려있어서 어린 시절 나는 아무 때나 그들의 집을 기웃거렸다. 그들은 내 가까운 이웃이면서 여러 삶과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던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꿈을 통해서 그들과 만난다. 그들은 떠나갔지만 내 꿈속에 나타나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신기한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사자가 내 곁에 24시간 내내 머무를 리 없다. 『나와 그 녀석의 마지막 경주』에서도 히사오 할아버지는 다케시와 어느 순간을 함께 하고 때가 되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 내 꿈속에 나타나는 사자들 또한 일 년 내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찾아온다. 어쩌면 그 순간을 내가 함께하기란 복권에 당첨되는 만큼이나 어려울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어렸을 때 동네에서 곡소리, 상여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탄생과 죽음을 집 안, 동네 안에서 어느 정도 인식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탄생과 죽음은 내 일상 속 바로 옆에 존재했다.  

  이윽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질문이 있다. 나는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나는 진정한 해방과 삶의 진리까지는 모르겠다. 단지 나는,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줄 아는 살아있는 그 누군가에게 삶과 죽음이 단절되고 닫혀있는 것이 아닌 열려있고 이어져 있는 세계이며, 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실체로 기억되고 싶다.   


  누구나 죽음은 두렵다. 병에 걸리는 것도 무섭다. 하지만 사는 데까지는 열심히 죽는 그 날까지 살아보고 싶다. 그래야 죽을 때 미련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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