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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애 Oct 03. 2022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재활용 봉지를 나눠준다더니

재활용 봉지를 나눠준다더니/ 김미애     

“쓰레기 분리수거 규정이 강화되어 지금부터 약 5분에 걸쳐서 한 달 사용분의 재활용 봉지를 나눠주려고 하니 한 분도 빠짐없이…….”

점방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한 달분의 재활용 봉지를 나눠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느라 골목골목을 누비는 승합차의 지붕 위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오라는 안내방송이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건너편 철물점 옆의 간이부스에서 딱 5분 동안 재활용 봉지를 나눠준다고 하니 금방 갔다 와도 될 것 같아 일손을 멈추고 그곳으로 갔다.

언젠가 중소기업제품박람회에 갔을 때 사람들의 상체가 천에 가려 안 보이는 그 틈새로 뭘 하는지 비집고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을 갖게 했던, 그런 작은 부스였다.

부스 안에는 재활용 봉지라고 쓰인 상자를 올려놓은 탁자가 있고,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마이크 테스트하고 있었다. 부스 바깥에 서 있던 또 한 명의 남자는 느릿느릿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나팔처럼 입에 대고 얼른 오라고 외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리 점방 바로 옆의 부동산 할아버지는 편찮으신 할머니 대신 참석하셨다. 점방 건너편의 수다쟁이 할머니도 벌써 나와 계셨는데, 나를 보자 점방은 어쩌고 나왔느냐고 알은체하셨다.

노인들을 상대로 건강보조식품이나 의료기구를 파는 업체를 찾아다니며 몸에 좋다는 약은 기백만 원도 아까워하지 않으시면서 껌값을 지불할 때는, 지금은 그나마 300원짜리 껌은 없어져 버렸지만 300원짜리 살까, 500원짜리 살까, 한참을 망설이는 분이시라 한 달 분량의 재활용 봉지를 나눠준다는 자리에 빠질 분이 아니다. 그 외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몇 명 더 있었다.     

수중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폐를 헐면 금방 써지니까 안 된다고 기어이 100원 단위를 외상하고 가는 얼룩무늬 몸빼 바지 입은 아주머니도 보였고, 두부 사러 왔다가 두부 판에 서너 모가 남아 있는데도 제사 모시려고 그런다고 새 판에서 잘라 달라고 억지를 쓰던 내 또래의 여자도 보였다.

과자 진열대 사이의 통로에 쪼그리고 앉아서 참이슬 소주 한 병을 종이컵에 부어 안주도 없이 물 마시듯이 마셔버리고 또 한 병을 바지춤에 쑤셔 넣어 가곤 하던 아주머니도 보이고, 부스스한 파마머리를 고무줄로 묶은 아주머니도 나와 있었다.

다들 나처럼 안내방송을 듣고 공짜로 나눠준다는 말에 혹해서 나온 듯했다. 대부분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고, 젊은 층은 얼마 전에 결혼한 리모델링 사무실의 새댁밖에 안 보였다.

도로변 리어카에서 붕어빵 장사하시는 아주머니와 함께 부스 앞에 서 있던 그 새댁이 나를 보더니 모여든 사람들 틈에 끼어 있는 자신이 멋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약 5분에 걸쳐 봉지를 나눠준다고 하면서 재활용 봉지에 분류해서 담아야 할 것을 당부하던 남자가 일회용 비닐봉지를 한 장씩 나눠줬다. 그러고 나서재 활용 봉지를 나눠주기 전에 먼저 협력업체에서 협찬한 사은품을 나눠주겠다며 좀 더 가까이 다가와나눠준 비닐봉지를 내밀게 했다.

비좁은 부스 안에서 바짝 붙어 서서 너도나도 서로 먼저 받으려고 봉지를 든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틈에 끼어 있으려니 이 사람 저 사람의 구취와 땀내가 범벅이었다. 심지어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진동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은품이라고 나눠준 것을 받고 보니 미량의 더덕 씨앗이 든 봉지다.

더덕 씨앗을 받아봐야 심을 공간이 없으니 그런 것 말고 애초에 나눠주겠다는 재활용 봉지나 얼른 주면 좋겠는데 홍보하는 중간에 자신이 홍보한 내용을 숙지하였는지 확인하느라 몇 번이고 되물었다. 제일 먼저 대답한 사람이나 크게 말한 사람에게 더덕 씨앗을 한 봉지 더 담아 주니 그거라도 더 타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묻는 내용에 대한 답을 큰 소리로 합창했다.

약속한 5분은 30분이 훌쩍 넘었는데 여전히 협력업체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말이 길어질 게 뻔했다. 방송으로 쓰레기 분리수거를 들먹이며 재활용 봉지 운운해서 난 당연히 구청에서 홍보하러 나온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구청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재활용 봉지를 나눠주겠다는 것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특정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얄팍한 미끼에 불과했다.

이왕 나온 김에 뭐라고 하는지 끝까지 지켜볼 심산이었지만, 좁은 천막 안에 감돌고 있는 역겨운 냄새가 견딜 수 없어 부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심호흡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딱 5분에 걸쳐 한 달 분량의 재활용 봉지를 나눠준다는 말만 믿고 다들 바쁜 일손을 미루고 나왔던 것일 텐데 특정 제품에 대한 홍보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오기로 끝까지 지켜보고 있으려니 너무 따분하여 리모델링 사무실의 새댁과 포장마차에서 수작이 뻔한 결말을 주고받으며 오텡을 먹었다. 그때까지도 끝나지 않은 선전이 포장마차에까지 들렸다.

"여수, 목포 등 타지역에서 많은 사람에게 맛을 보시라고 소량이나마 열흘분을 공짜로 나눠줬는데,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솔직히 열흘 먹어보고 큰 효과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곳 광주에서는 단 몇 분이라도 효과를 보라고 삼십만 원짜리 홍삼엑기스를 감사의 뜻으로 딱 네 분한테만 한 병씩 나눠주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혈압 높으신 분 안 계세요? 혹시 당뇨 있으신 분? 그런 분들은 필히 드셔야 하니 주저 말고 손을 드세요.딱 네 사람한테만 공짜로 드릴 테니 부담 없이 드시고 효과만 얘기해주면 됩니다. 어디 희망하실 분 안 계세요?"

그러면서 자신의 한 손을 높이 들고 좌중을 두리번거렸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 시골 장터에 가면 유랑 국극단이 보름 이상 머물면서 대형 천막을 쳐놓고 구성진 판소리가 가미된 창극의 중간에 약 선전을 하였다. 지네나 굼벵이를 말려 빻은 가루를 몸에 좋은 약이라고 해도 다들 혹할 정도의 사탕발림으로 군중 심리를 자극하였다. 그래도 그때는 휘황한 의상과 분장을 하고 심금을 울리는 창극 보는 재미라도 있었다. 혹시나 하고 왔다가 그제야 역시나 하는, 속은 느낌이 들었을까. 그런 상술은 많이 봐 와서 다들 심드렁하였는지,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비싼 제품을 공짜로 주겠냐 싶어 아무도 선뜻 호응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이탈하기까지 했다.

이제까지 침을 튀겨가며 열을 내서 홍보했던 그 50대의 남자가 지원을 안 할 사람은 얼른 돌아가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썰렁해졌다.

“재활용 봉지는 언제 줘요?”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섰다.

한 시간 동안 기다렸던 시간이 아까웠던 듯했다. 그러자 이미 줄 사람은 다 나눠줬다고 인상을 구기며 얼른 가라고 손사래 쳤다. 애초부터 재활용 봉지는 순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였다.

언젠가 그릇 선전할 때도 그렇고, 신토불이 국수 판매업체에서 나왔다고 했을 때도 그와 비슷한 경험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으면서 또 당하다니, 공짜 좋아하면 머리 벗겨진다고 했는데...그래서 내 머리가 휑해졌을까?     

아무리 제품 홍보도 좋지만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서민들을 우롱하여 피해를 주는 홍보는 하지 않아야 하는데, 다른 곳에 가서 또 얼마나 입에 발린 말과 미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현혹시켜 몸에 좋다는 말에 귀가 얇아진 노인들을 등쳐먹으려 할지 심히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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