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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애 Oct 12. 2022

앉아서 주고 서서 받다

괜히 빌려줬다가 낭패

앉아서 주고 서서 받다


내가 정한 원칙 중의 하나가 돈거래는 하지 말자, 이다. 

가진 게 없으니 빌려줄 것도 없고, 남한테 손 내밀며 아쉬운 말을 할 입이 없으니 빌리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한테 빌려주고 나면 왜 돌려주지 않을까, 받을 때까지 신경이 쓰인다. 그럴 땐 차라리 그냥 줘버린 셈 치고 포기를 해버려야 속이 편하다. 그래도 아까운 마음이 완전히 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안 빌려주고 안 빌리는 것인데 인정에 이끌려 빌려줬다가 낭패를 본 기억이 있다.

내가 1년 정도 사무직으로 다녔던 직장에 게나 고동이나 사장님으로 불리는 사업자 중에 짧게 깎은 불밤송이 같은 머리에다 무스를 잔뜩 처발라 날을 세우고 다니는 스물여섯 살 먹은 사업자가 있었다.

어느 날, 요금을 못 내서 핸드폰이 끊겨버렸다며 며칠 있다 꼭 줄 테니 나더러 대신 내달라고 사정했다. 한 사무실에 근무하는 처지에 몰인정하게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어서 7만 원이나 되는 요금을 대신 내줬는데 며칠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휴대폰 요금은 연체하고 쥐뿔도 없으면서 꼴에 사장입네, 허영만 가득 차서 파리가 앉다가 쭈르르 미끄러질 정도로 번들번들한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저 쓸 것은 다 쓰고 다녔다. 

끼니마다 외식하고 이빨 쑤시고 다니면서도 돈이 있어야 줄 것 아니냐고 눈을 부라렸다. 뺀질거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하여 그 밤톨 머리 사업자한테는 단돈 100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월말에 공과금 내려면 은행 잔고가 빠듯할 때였다. 빌려준 돈을 달라고 그 사업자한테 어렵게 얘기를 꺼냈는데 며칠을 미루고 또 미루더니 석 달이 넘도록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한테는 몇 푼 안 되는 돈일망정 미안한 구석도 없이 되레 큰소리치는 게 어찌나 얄밉던지, “내일 당장 갚아!”라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다음 날, 그 밤톨 머리 사업자가 퇴근 시간 15분 남겨 두고 발끝을 바깥쪽으로 벌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걷는,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며 당당하게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걸어오더니 오른쪽 어깨에 메고 온 자루를 내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내가 빌려준 7만 원을 농협에서 100원짜리 동전으로 6만 원, 50원짜리로 1만 원을 바꿔 뒤죽박죽 섞어 담은 돈 자루였다. 그러면서 이제 다 갚은 것이라고 했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지 아쉬울 때는 요긴하게 썼으면서, 당연히 갚아줬어야 할 돈인데 왜 맘보를 그렇게 쓸까?

은행에서 동전으로 바꿀 때 100원짜리는 5,000원 단위로, 50원짜리는 2,500원 단위로 종이에 돌돌 말린 것으로 준 걸 일부러 풀어서 뒤섞어 놓은 심보는 뭐였을까? 

동전을 감싸고 있는 종이를 일일이 찢어 섞고 그 무거운 자루를 계단으로 운반해 오느라 고생깨나 했겠다.

 형편이 안 되어서 너무 늦게 갚아 미안하다고 한마디 했으면 나 역시 독촉해서 오히려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텐데······.

동전을 골라가며 세느라 고생 좀 해보라고 골탕을 먹일 심산이었던 듯하지만 내가 동전 세는 데에 이력이 난 걸 모르는 모양이다. 

어찌 생각하면 한없이 유치하기도 하고, 여전히 괘씸한 생각도 들어 한마디 해 주려다 혼자 픽 웃고 말았다. 그렇더라도 너무 씁쓸했던 기억이다.

그 동전 꾸러미 이후 저나 나나 업무상 어쩔 수 없는 말은 해도 난 그 밤톨 머리 사업자가 보여도 안 보이는 존재로 무시했다.

그 직장을 그만둔 날 계단을 내려가다 올라오는 그 밤톨 머리 사업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내가 지나치며 내려가면서 한마디 했다.

 “잘 있어. 동전!”

뭔 소리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한 대 맞은 듯 멍하게 입을 벌리고 서 있던 표정이 내 뒤통수에 느껴졌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해소되듯 속이 후련했다.

지금쯤 그 밤톨 머리도 40 중반을 바라볼 나이가 되었을 텐데 어디선가 여전히 거들먹거리며 고약한 심보를 쓰고 있을지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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