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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애 Oct 13. 2022

울 엄마

자식들 뒷바라지에 등골 휜 울 엄마

30년 전,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었을 때, 서른을 바라보는 딸이 행여 시집을 못 갈까 봐 애를 태우고 한숨이 끊이질 않으셨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무릎을 치며 “아이고오!”라는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고 하던 엄마다.

 “어야, 어디 괜찮은 총각 있는가 봐보란 말시!”를 입에 달고 윗동네 아랫동네로 발품 팔고 다니셨다.

“다른 집들은 총각이 서로 데려가려고 동구 밖까지 줄을 섰다고 하드마 나는 뭔 복쪼가리가 딸 하나를 시집 못 보내고 이렇게나 성가시까잉! 딸만 줄줄이 있는 탑동 칠 공주네도 딸들 시집을 잘만 보내든디…….”라는 푸념하시며 애달아하셨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일구었어도 여전히 눈에 밟히셔서 강진 오일장 보실 때마다 조금씩 사다 냉동실에 얼려둔 생선이며 텃밭에서 손수 기른 채소를 종종 챙겨주셨다. 그리고 부모님의 품을 떠나 자취할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이 챙겨주신 게 참기름이다. 지나가다가 고소한 냄새만 나도 엄마 생각이 절로 날, ‘엄마표’ 참기름은 자식들이야 엄마가 으레 챙겨주시는 것이려니 하며 덥석 받곤 하지만 그건 부모님의 젊음과 피와 땀을 쥐어짠 결정체였다.     


몇 푼 안 되는 시내버스 요금을 아끼려고 터미널에 내려서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양손에 각종 김치 보따리를 들고 서너 정거장이 넘는 거리를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객지에 사는 자식들 집에 져 나르며 헌신적으로 네 남매 뒷바라지하셨던 엄마는 아버지보다 자식을 더 챙기셨다.      

객지에 사는 자식이 걸려 밥 한 끼라도 더 해주고 싶으신 엄마가 찰밥 한 솥과 붕어 무조림이나 짱뚱어탕 한 냄비 끓여놓고 한 달이면 열흘 정도를 집을 비우곤 하셨어도 아버지는 쓰다 달다 원체 말씀이 없으실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이셨다. 자식에 대한 엄마의 헌신을 아버지가 이해해주실 분이란 믿음이 있었을 것이기에 가능하였다. 하지만 출타하셨다가 집에 들어오셨을 때 첫마디가 “엄마 있냐?”였던 아버지가 아무도 없는 컴컴하고 썰렁한 빈집에 들어서서 혼자 식사를 챙겨 드실 때 얼마나 적적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과 난관을 극복하고서야 내가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 엄마 역시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이면서도 듬직한 아들 같은 사위 보게 되었다고 마냥 좋아하셨다.

나를 어떻게든 시집만 보내면 한시름 놓을 줄 아셨을 텐데, 불면 날아갈세라 금이야 옥이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키운 딸을 막상 시집보내놓고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홀가분함보다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하셨다. 행여 어려운 시어머니 눈밖에 안 나고 남편 사랑받고 사는지 내내 걸리셨을 엄마다.     

김치도 변변히 담글지 모르는 내가 홀시어머니 모시고 살림하랴, 직장에 다니랴 종종거리는 게 마음에 걸려 밑반찬이라도 만들어다 주며 어쩌고 사는지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 하셨을 것이면서도 시집 식구 어려워 통 못 오셨다. 

     

찌는 듯한 한여름, 세 이레 동안을 산후 몸조리시켜주고 갓난아이 돌보느라 힘에 부치셨을 텐데도, 방문도 채 열리지 않는 셋방에 사는 내가 맞벌이한답시고 아이 봐줄 사람이 없어 걱정하자 선뜻 키워주마고 하셨다가 정성 들여 키워준 공도 없이 5년 동안 고생만 하셨다.     

휜 등골을 펼 새도 없이 고생만 하시다 아버지는 가시고기처럼 자신의 전부를 내놓고 허망하게 빈손으로 가신 후, 엄마는 자글자글한 주름과 한 보따리의 약을 보듬고 혼자 남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제일 죄송한 게, 우리 애들을 키워주시느라 팍 늙으신 5년 세월이다. 우리가 젊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힘 좀 펴라고 두 손주 업어 키우느라 고생만 하셨는데, 아버지와 변변한 여행 한번 못 가보고 홀로 남게 되신 엄마의 인생이 너무 억울해 보였다.

엄마의 맹목적인 교육열과 희생에 만 분의 1도 충족시켜드리지 못하고, 네 남매 중 누구 하나 마음에 걸리지 않는 자식이 없으니, 자식에게 헌신한 공은 수포로 되어버렸다고 여기실까.

건강이라도 괜찮다면 그나마 낫겠는데, 어느 한 군데 성한 구석이 없이 아파도 얼른 달려와 줄 사람도 없다. 일 년에 겨우 두어 번 자식들 얼굴 보는 낙 말고 기대할 게 없으니, 지나온 80 평생을 되돌아보며 엄마는 얼마나 허허로우실까. 


지금 나이의 10년 만이라도 보상받으실 수 있으면 엄마는 자신을 위해 무얼 하시고 싶으실까.

이제껏 엄마 자신을 위한 삶을 희생하고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서만 살아오신 지난날들이 조금은 덜 후회스러웠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더라.’하는 후회만 남으신 건 아닐지…….

인생 덧없다고 하시며 이제라도 하고 싶은 것 마음껏 누리며 살고 싶다고 하면서도 이미 몸에 밴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콩 한 줌, 고춧가루 한 줌이라도 더 챙겨주시기 위해 뙤약볕 아래 묵정밭을 일구느라 아픈 다리 질질 끌며 고생하시는 엄마. 


예전에 엄마가 나 때문에 속이 상하실 때면 “인제 봐라! 이다음에 시집가서 꼭 너 같은 자식 낳아서 키워봐라! 그러면 내 속 알 것이다!”라는 말씀과,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것이니 이다음에 왜 엄마 말을 안 들었던고, 하고 후회하지 말고 공부할 수 있을 때 공부해라!”라고 마르고 닳도록 말씀하셨다.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이들의 진로를 걱정하는 나이가 되고서야 엄마가 하셨던 말씀의 깊은 뜻을 알겠다. 이래서 나이가 가르치는 거라고 하는 건가 보다.


나 낳으시고 키우느라 애 많이 쓰셨는데 순간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툭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했거나, 마음 상하신 일이 있다면 다 잊어주셨으면 좋겠다.

자주 전화는 못 드려도 “엄마!”하고 부르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해주는 엄마가 계셔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목에 걸린 이 말을 안 하면 정말 후회스러울까 봐 용기를 내어 외쳐본다.


엄마! 엄마! 엄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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