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언어-스페인어로 살다 #5
스페인은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유럽의 몇 나라 중 하나이다. 아침식사라도 주문하려고 하면 ‘오렌지 주스’나 ‘버터’ ‘잼’ 이런 기본 단어들부터 통하지 않아 당황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오렌지가 오렌지가 아니라고?”
스페인에 놀러 온 친구들이 나에게 많이 묻던 말이다.
그렇다. 스페인에서 오렌지는 ‘오렌지’가 아니다. ‘naranja’(나랑하)이다.
스페인 남부 세비야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사람도, 음식도 아닌 도심 가로수였다. 마트나 시장에서 봐 왔던, 보기만 해도 새콤달콤함이 느껴지는 오렌지가 길 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가로수에 매달린 오렌지가 노랗게 익어갈 즈음, 친구에게 "가로수에 달린 오렌지를 따먹어도 되냐?"라고 물었고 친구는 "먹어도 잡아가진 않아"라는 모호한 답을 했다. 그 말을 믿고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오렌지를 슬쩍 하나 딴 뒤 입안에 넣었을 때 내 선택이 옳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됐다. 가로수에 매달린 오렌지는 우리가 흔히 먹던 새콤달콤한 오렌지가 아니라, 쓴맛 오렌지(Naranja amarga)였기 때문이다. 쓴 맛이 나는 오렌지 종류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 오렌지는 주로 잼을 만드는 용도로 수출이 된다고 했다.
쓴 맛이 나건, 단 맛이 나건 겨울이 오면 도시의 풍경은 금빛 오렌지 빛으로 물든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겨울의 서늘함 대신 금빛의 풍요로움이라니.
그뿐이 아니다. 겨우내 빛나던 오렌지가 다 떨어지고 따뜻한 봄이 오면 아사르(Azahar)라고 부르는 오렌지 꽃이 달콤한 향을 뿜어내며 온 도시를 감싼다. 이 오렌지 꽃과 향기는 세비야의 대표적 봄 이미지로 자리를 잡고 있을 만큼 스페인, 특히 ‘세비야와 오렌지’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다.
어느 봄 밤, 다른 도시를 여행하고 밤늦게 세비야 기차역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오는데 도시의 풍경보다 먼저 코 끝에 다가오는 오렌지 꽃 향을 맡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곳을 떠나도 이 향은 오랫동안 잊지 못하겠구나”라고.
스페인어에는 ‘media naranja 메디아 나랑하 (오렌지 반쪽)’이라는 표현이 있다. 바로 ‘나의 반쪽’을 뜻한다. 그러고 보면 ‘내 반쪽’을 ‘오렌지 반쪽’이라고 할 만큼 오렌지를 사랑하는 이 나라, 온 도시가 계절을 바꾸며 오렌지와 공생하는 그곳에서 ‘오렌지’를 그들만의 단어 ‘naranja나랑하’라고 한다고 하여 뭐가 그리 이상한 일일까 싶다.
스페인어에 유독 외래어가 적은 이유에는 프랑코 독재시대의 영향도 있다. 당시 프랑코는 외래어 사용을 전면 중단시켜서 외국에서 들어오는 단어들은 모두 스페인어로 변형되었다. 이로 인한 또 하나 재미있는 현상은 여전히 극장에 자막보다는 더빙된 영화 상영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의 더빙 기술은 최고의 수준이라 말해지기도 한다. 한 번은 텔레비전에서 ‘공동경비구역 JSA’를 방송했는데 스페인어를 쓰는 이영애와 이병헌이 어찌나 어색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