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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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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30. 2020

첫 만남

며칠째 잠이 쏟아진다. 이건 분명 어딘가 크게 아프거나 임신이거나 둘 중 하나다. 딱 느낌이 왔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갑상선암에 많이 걸린다던데, 친구네 사촌 언니도, 아는 오빠도 수술했다던데 나도 그거 아닌가. 요즘 회사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 ‘암 걸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말이 씨가 됐나. 최근에 두 번이나 지하철에서 너무 어지러워 중간에 내렸는데 그것도 전조 증상일지 몰라. 큰 병원을 가야 하나. 갑상선 병원을 찾아가기 전에 우선은 임신테스트기를 해보는 게 빠르겠지. 잠들기 직전의 오빠를 흔들어 깨우며 얘기한다.


- 오빠 내일 일어나면 나가서 테스트기 좀 사 와요.

- (어떤 테스트기 인지도 모르면서) 응? 응.


오빠가 일요일 아침에 문을 연 약국을 찾아 어렵게 사온 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 변기에 앉는다. 5초 만에 결과가 나온다. 그렇게 ‘너’의 존재를 알았다.


문밖에 있던 오빠는 두 줄을 보자마자 안 어울리게 조금 울었고, 나는 이상하게 차분한 기분으로 옷을 챙겨 입었다. 어떤 병원에 가야 하는지 잠깐 상의하고, 전화로 일요일에도 진료를 하는지 물어보고, 외투를 챙겨 집을 나올 때까지도 큰 감흥이 없어 이상했다. 병원에서 0.2cm짜리 점을 확인하고 그 점에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 그제야 나도 조금 울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약간의 설렘과 책임감과 두려움과 벅참 같은 것들이 뒤엉켰다. 의사 선생님은 아주 해맑고 가볍게 ‘일단은’ 임신으로 보이나 8주 전에는 자연 유산하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하고 2주 후에 만나자고 했다. 무시무시했다. 우리는 뭔지는 모르지만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날 우리가 점심으로 뭘 먹었더라.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고를 수 있는 가장 건강한 메뉴를 골라 아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던 것 같다. 그러고는 최대한 들뜨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으며, 2주를 기다렸다. 내 생에 가장 긴 2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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