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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심연

E. T. A. 호프만 <모래 사나이> | 민음사

by 오늘

E. T. A. 호프만은 19세기 초 활동했던 독일의 작가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문학보다는 음악 활동에 더 열정을 쏟았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휘리릭 대충 쓰고, 음악 분야로는 다방면으로 활동을 이어갔으나 잘 안 풀렸다고 한다.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는데 그가 남긴 문학 작품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읽히고 있다. 매년 연말이면 전 세계에서 공연되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원작자도 E. T. A. 호프만이라고 한다.


그의 대표작인 <모래 사나이>는 환상적이고,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집중한 심리소설 느낌이라 지금까지 읽었던 독일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E. T. A. 호프만은 괴테와 함께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낭만주의는 이전의 사조인 계몽주의에 반하여 이성과 합리, 절대적인 것을 거부했다. 인간의 감정과 내면에 침잠하며, 상상력으로 구현된 초현실적인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E. T. 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초현실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환상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의 소설은 인간의 분열된 내면, 특히 불안과 죄의식, 공포를 중심으로 한 어두운 감정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표제작 <모래 사나이>에서 나타나엘은 청우계 장수를 만나고 그가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던 코펠리우스를 떠올린다.


나타나엘의 두려움은 어린 시절 들었던 ‘모래 사나이’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잘 시간이 되어도 잠들지 않는 어린이들에게 전해졌던 민담이 나타나엘의 마음속에서 근원적인 공포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나타나엘의 공포는 층계를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강화되고, 낯선 남자 코펠리우스의 방문으로 확장된다. 공포는 그를 둘러싼 낯선 분위기를 감각적인 문장을 통해 촘촘하게 쌓아가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나타나엘의 공포는 아버지의 죽음과 맞물려 있기도 하지만 코펠리우스의 방문 이후 그가 목격한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옅은 연기(12쪽)”와 “이글이글 타는 시뻘건 집게(16쪽)”로 “밝게 반짝이는 덩어리를(...) 부지런히 망치로 두드린”것과 같은 사건 자체에 있다. 코펠리우스는 나타나엘의 아버지와 함께 연금술과 같은 신비로운 화학 실험을 감행했던 것이 아닐까.


망원경과 관련한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나듯 나타나엘의 과학적인 것에 대한 반감은 여러 장면에서 드러난다. 나타나엘에게 과학은 낯선 감각을 일깨워 두려움을 주는 무엇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세계에 속한 것이기도 했다.


나타나엘이 공포를 느낄 때마다 그의 환상 속에서 코펠리우스가 등장한다. 약혼녀와 파국의 감정을 느낄 때에도, 나타나엘이 사랑하게 된 올림피아가 사람이 아닌 자동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코펠리우스의 환상을 본다.


반복되는 은유인 ‘눈’(진실)의 상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본다면 당시의 과학은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맞물려 나타나엘 내면에 분열을 불러일으킨다.


모래 사나이 민담을 전해 들은 순간 공포에 사로잡혀 ‘눈’(자기만의 시선)을 잃어버린 나타나엘에게는 자신의 언어에 대한 확신도, 아버지의 세계에 저항할 힘도 없었다. 시선과 언어를 잃어버린 나타나엘에게 코펠리우스는 환상 속에 등장해 방어적인 대언자의 역할을 한다.


분열을 일으킬만한 심각한 갈등 앞에서 나약한 인간은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 말고는 달리 해결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가 눈과 함께 잃어버린 마음의 언어들은 심연 깊은 곳에서 타오르다 곧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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