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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Nov 09. 2023

유자차 : 가라앉지 않으려면 휘휘 저어요.

날이 추워지면서

붕어빵이나 군고구마가 눈에 들어오네요.


제가 일하는 편의점도

지난달부터 군고구마 기계를 들여와서

가게에서 매일 고구마를 굽고 있지요.


저는 카페에서 일한 적도 있는데요.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카페여서

이맘때가 되면 사장님은 각종 청종류를 구비해

놓으셨던 게 떠올라요.

유자청, 자몽청, 한라봉청 등

메뉴판에 없는 청까지 들여놓으셨어요.


카페 아르바이트는 다양한 이점이 있는데요.

저는 그중

아르바이트생이 다양한 음료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을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만년 아이스아메리카노만 먹다가

카페에서 일하면서

쌍화차, 생강차도 마셔보고

유자차도 꽤 많이 먹어봤어요.


뜨끈 뜨근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질 땐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유자차가 그리 달가운 음료는 아니에요.

용기에서 스푼으로 옮겨 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떨구곤 하는데 끈적거리고요.

설거지할 땐 음료 밑바닥에 가라앉은 유자가

하나의 음식물 쓰레기가 되거든요.


제조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마실 때도 유자를 충분히 젓지 않으면

맛이 우러나지 않아

니맛도 내 맛도 아닌, 밍밍한 맛이 나요.




저는 5년 넘게 항우울제를 먹었고

지금은 제 맘대로 단약하고

어찌어찌 잘 버티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들어 한 가지 고민이 생겼어요.

감정이 날씨의 영향을

정말 정말 많이 받는다는 점이에요.

제 방은 점심이 지나서부터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데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햇빛이 들지 않아서 그런지

감정이 터진 풍선처럼 추락해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그저 잠만 자고 싶어요.

씻는 건 아주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요.

청소는 아주 힘든 일이고요.

겨우 힘을 내서 뭔가를 먹으면

명치에 떡 하니 얹힌 기분에  고역이랍니다.


오늘도 그렇게 하루를 통으로 날려 보내고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앉았어요.

엄밀히 말하면

지금은 편의점 카운터 안쪽이랍니다.

일단 아르바이트는 나와야 하니까

겨우 앉아서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러다가 문득 유자차가 떠올랐어요.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맛을 내기 위해서는

휘휘 저어줘야 한다고요.

마시다가 중간중간 저어주면 더욱 좋지요.


제가 조악한 글을 쓰고

삐뚤빼뚤한 그림을 그리고

집중이 안 돼도 일단 책을 펼치고

오디오북을 트는 것도

가라앉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저는 유자차 안의 유자처럼

그대로 가라앉아 버리겠지요.

게다가 지금은 약이라는 낙하산도 없으니

그대로 지면에 고꾸라지겠지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의무적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누가 봐주지 않고

무반응에 거절당하기 일쑤더라도

일단은 살기 위해서 해봐야겠단 생각이 많이 들어요.


사실 요즘은 반 고흐의 편지글이 많이 생각나요.



동생 테오에게 돈을 부탁하고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요.

비참할 수 있는 그 상황에서도

이번엔 달라질 거다.

이번엔 다르다고 말하는 것 같거든요.

생의 감각, 절절함이 많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만약 마음속에서 '나는 그림에 재능이 없는걸'이라는 음성이 들려오면 반드시 그림을 그려 보아야 한다. 그 소리는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잠잠해진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

감정이 습기를 머금을 때

그래서 저를 한없는 중력의 힘으로 매다 꽂을 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해 보려고요.


그럼 유자차 안의 유자들이

스푼을 따라 이리저리 넘실거리며 춤을 추는 것처럼

현재의 어려움과 고됨을 날려버릴 수 있으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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