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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화랑 Sep 13. 2024

계획은 틀어지고, 송편은 빚어졌다

  일요일 오후 8시

  평소처럼 내일 수업을 위한 준비물을 챙기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행주, 앞치마, 위생장갑, 떡을 담을 반찬통까지. 하나씩 챙길 때마다 내일의 일정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매주 월요일 아침 10시, 떡과 전통 간식 만들기 수업을 듣는다. 세 명의 조원이 함께하는 3시간 동안 우리는 매번 새로운 떡을 배우고 만든다. 이 수업에서는 7조로 나뉘어 돌아가며 당번조를 맡는다. 당번조는 30분 일찍 도착해 재료를 손질하고, 수업 후 설거지와 청소까지 도맡는다. 조별 수업도, 당번도 사소해 보이는 일일 수 있지만, 누군가 지각하거나 결석하면 다른 조원들에게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일요일 밤이 되면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살짝 스며든다. 월요일이 가까워질수록 그 긴장감은 점점 선명해진다.

  내일은 우리 조가 당번조다. 아이들을 7시 30분에 깨워 8시에 아침을 먹이고, 늦어도 8시 50분까지는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본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일요일 오후 9시

  아이들이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다. 물기를 닦아주며 로션을 발라주는데, 갑자기 아들의 발과 발목이 눈에 들어온다. 아침에 봤던 작은 물집 하나가 지금은 여러 개로 늘어나 발목까지 퍼져 있다. '설마 수족구일까?'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며칠 전 딸의 손에도 비슷한 물집이 한두 개 보였었다. 그때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수족구일 수 있으니 병원에 가보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아들의 발에 물집이 여러 개 생긴 걸 보니, 내일 아침 병원에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확실해 진다.

  '내일 어린이집에 못 보내면 어떡하지?' 

당번조에다 준비물도 내가 챙겨 가야 하니 수십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마스크를 씌우고 준비만 간단히 마친 뒤, 준비물만 드리고 돌아올까?손은 여전히 아들에게 로션을 바르고 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물집 몇 개가 내일의 모든 계획을 뒤흔든 것처럼 느껴진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계획이 무너진다는 불안감까지 스며든다.


 월요일 아침 8시 50분

  웨건에 아이 둘을 태우고 소아과로 달린다. 병원에 도착하니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다행히 대기 순서  첫번째다. 짧은 대기 후 순서가 되어 들어가니 선생님께서 발과 발목을 살펴보시며 말씀하신다.

"수족구 아니에요. 모기에 물린 거예요."

말씀을 듣는 순간 어젯밤부터 꽉 막혀 있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뚫린다. 바짝 말라 쓴맛이 났던 입에 다시 활기가 돈다. 진료리를 마치고 다시 웨건을 끌고 어린이집으로 달린다. 

"엄마, 천천히 가!" 

아이들이 외친다.


  월요일 아침 9시 15분

  어린이집에 도착해 보니 내 모습이 마치 비에 흠뻑 젖은 생쥐 같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다시 집으로 달린다. 집에 도착해 땀으로 젖은 옷을 얼른 갈아입고, 집에 놓고 온 아이들의 낮잠 이불을 챙겨 어린이집에 전해드린 후 차에 올라탄다.


  월요일 아침 9시 25분

  신호에 걸려 휴대폰을 꺼내 팀원 언니들에게 카톡으로 사과 메시지를 남기고 숨을 고른다.

"안녕하세요. 급하게 아이들 병원에 들렀다 가느라 수업 시간 5분 전에 도착할 것 같아요. 당번조라 일찍 가야 하는데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강의실로 향하는 길. 문득 작년과 올 초까지 워킹맘으로 일하던 때가 떠오른다. 아이들이 아플 때마다 연차를 쓰고 팀원과 팀장님께 미안함을 느꼈던 순간들이 어제 일처럼 스쳐간다. 늘 미안하고 눈치 보던 그 시간들.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듣는 것조차 나에겐 무리일까. 사치일까. 그런 생각에 입안이 또다시 쓰다.


  월요일 아침 9시 55분

  "늦어서 죄송합니다."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서둘러 함께 수업 듣는 언니들에게 가서 돕는다. 오늘은 추석을 맞아 송편을 빚는 날이다. 15분에서 20분간 1.5kg 반죽을 손으로 치대야 한다고 한다. 자연스레 늦게 온 내가 자처해 본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달려온 탓일까, 힘이 빠지고 손목이 찌릿찌릿해온다.


 월요일 오후 2시

 수업이 끝나고, 당번조로서의 역할도 모두 마무리되었다. 따끈따끈한 송편을 입에 넣어 본다. 쫄깃하게 씹히는 송편이 입안에 가득 차지만, 마음 한구석의 피로감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래도 작은 성취감이 밀려온다. 오늘 하루가 생각만큼 완벽하진 않았어도, 이렇게 마무리되는 걸 보니 그래도 나쁘지 않다. 이 소소한 만족감이 내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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