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화랑 Oct 22. 2024

아버지의 벽을 넘어서

 나의 아버지는 내가 자란 시골 마을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면 단위의 작은 마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듣던 그는 새마을 지도자로 시작해 국회의원 보좌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정치적 꿈을 이루기 위해 군의원과 도의원 선거에 잇따라 출마하면서, 마치 그 길이 그의 전부인 양 살아갔다. 아버지에게는 성공에 대한 맹렬한 집념과 정치라는 거대한 이상이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잇따른 낙선, 사업의 연이은 실패, 보증 문제, 도박과 외도... 그의 삶은 금기를 무색하게 하는 파란만장한 일탈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자신의 거대한 꿈을 위해 가족들을 희생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꿈은 우리 가족의 모든 작은 꿈을 앗아갔다. 나는 글쓰기 수업의 주제로 '아버지'를 택하면서 오랜 시간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꺼내 보았다. 상처와 원망으로 겹겹이 쌓여있던 시절을 다시 떠올리며, 나는 글로써 아픔을 씻어내고자 했다. 그때 문득, 가장 깊이 아버지에게 상처받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와 12살 차이가 나는 큰오빠, 그리고 7살 차이가 나는 작은오빠에게도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우리 셋이 가장 크게 상처받았던 순간은 모두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모든 시절 우리 집은 아버지의 연이은 실패로 인해 가난의 늪에 빠져 있었다. 한때는 전기를 고칠 돈이 없어 스탠드를 켜놓고 살았고, 한겨울에는 고장 난 보일러를 수리할 돈이 없어 친구에게 빌린 전기장판을 깔고 어머니와 몸을 맞대고 잠을 청해야 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나를 무너뜨린 것은 그러한 생활고가 아니었다. 내가 서울의 4년제 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의 차가운 말 한마디였다.

"여자가 대학은 무슨."

그의 말은 나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 그 한 마디가 마치 단단한 얼음장처럼 나의 꿈을 짓눌렀다. 친척들 사이에서도 이미 아버지의 신용은 바닥을 쳤고, 어머니마저 그의 탓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있었기에 더 이상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해 겨울, 동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전교 부회장이었던 내가 부모가 살아계시는데도 대학을 갈 형편이 안 돼 편의점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졌다. 선생님들은 안타까워했고, 친구들은 나를 위로해 주느라 바빴다. 마을 어른들은 뒤에서 아버지를 손가락질했다. 나는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시골을 떠날 때마다 스스로가 처참하게 느껴졌다. 그때마다 가슴속에 억눌린 분노와 좌절을 삼키다, 어느 날 홀연히 엄마에게만 알린 채 짐을 싸서 홀연히 서울로 떠났다. 나는 고시원에 머물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공부를 이어갔고, 그다음 해에 비로소 내가 원하는 전공으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큰오빠에게 전화해 물었다.

"오빠는 언제 아빠에게 가장 서운했어?"

오빠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체육교육과에 가고 싶었는데, 아빠는 무슨 선생이냐면서 내 의견을 무시하고 사회체육학과에 지원하라고 했어. 만약 체육교육과를 갔더라면, 내 인생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작은오빠도 마찬가지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세대에 합격했지만, 아버지는 대학을 보내줄 능력이 안 된다고 해서 지방 국립대에 가야 했던 거. 그때 일주일 내내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잖아."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는 꿈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 벽은 우리의 열망을 짓누르고, 오랜 세월 동안 원망과 아쉬움, 그리고 아픔을 남겼다. 사람의 꿈을 꺾는 이에게 남는 것은 결국 끝없는 후회와 미련뿐이다. 나는 아버지가 살아온 방식에서 배운 것이 있다. 누구도, 그가 내 가까운 지인이든, 멀리 떨어진 남이든, 혹은 친밀한 가족이든, 꿈을 이야기하는 이에게는 그 열망을 꺾는 말 대신 희망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상대의 꿈이 비현실적이거나, 그 길이 험난해 보일 때 어쩔 수 없이 충고를 던지곤 한다. 하지만 희망을 안고 나아가려는 사람에게 던져진 차가운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길을 막아서는 큰 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설령 응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의 꿈에 초를 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조언이라는 이름 아래 던져진 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 불씨를 꺼뜨렸는지 나의 오빠들, 그리고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삶에서 더는 아버지와 같은 벽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그 꿈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 약속을 지켜 나가며, 나는 비로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