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한 건 책이었다

by 시화랑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 내 주변에는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같은 동화책 한 권 가져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이 자랐다. 어린 내가 접했던 이야기라고는 학교에서 시험을 위해 억지로 읽어야 했던 교과서 속 문학 작품이 전부였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 미술, 전시 같은 문화 경험 역시 거의 없었다. 주변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알고 있던 세계 문학 전집이나 유명한 예술 작품의 이름은 나에게 낯설고 멀기만 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대외 활동을 할 때도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점점 더 입을 닫고, 주눅이 들었다. 나 스스로를 문학 문외한이라 생각했고, 상식이라곤 거의 없는 사람이라 느꼈다.


그런 내가 자신이 정말 멍청하다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나는 스물세 살 때 샤프 전자에서 주최하는 '리얼딕 세계 문화 체험단'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전액 경비 지원으로 유럽 4개국 문화를 탐방할 수 있는 기회였다. 2006년과 2007년에는 서류에서 탈락했지만, 2008년에는 드디어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 유럽이라는 곳은 내 형편으론 꿈도 꿀 수 없는 곳이었다. 그 꿈에 한 발짝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기쁨의 눈물이 났다.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면접을 준비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면접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면접 전에 간단한 상식 테스트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어린 왕자를 쓴 작가의 이름, 절규를 그린 화가의 이름 같은 문학과 예술 관련 문제들이 주어졌다. 스무 문제 정도 되는 테스트에서 나는 단 하나도 답을 쓰지 못했다.


점수는 0점이었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고? 나는 몰랐다. 생텍쥐페리인지 생땍지뻬리인지, 뭉크인지 몽크인지도 몰랐다. 면접에서는 유럽 문화와 문학 예술에 대한 관심을 어필해야 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돈이 없어 기회가 없었으니 꼭 데려가 주십시오." 당연히 탈락했다. 내가 면접관이라도 나를 뽑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스스로를 '똥멍청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보인다. 그때 깨달았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험도 중요하지만,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그날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금씩.


2011년, 나는 민음사 북클럽에 가입했다. 가입하면 세계 문학 전집 중 3권과 굿즈를 준다는 광고를 보고 신청했다. 그 굿즈에는 셰익스피어,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당시는 왜 그들이 굿즈에 그려졌는지조차 몰랐다. 노트는 내 첫 번째 독서 노트가 되었다.


책을 무작정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독을 품고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사람은 아니다. 신문을 구독하고, 거기서 추천 도서를 스크랩하고, 관심 있는 책부터 한 권씩 읽었다. 책에서 소개된 책이나 인용된 문장만 읽어도 마음에 와닿으면 그 책을 찾아 읽으며 독서의 가지를 뻗어나갔다. 나는 대학생이지만 내 지식수준은 중고등학생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독서평설 같은 책도 찾아 읽었다.


직장 상사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퇴사한 후 약 1년간 사람을 피하던 시기가 있었다. 매일 우울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때 모건 스콧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과 김혜남의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같은 책이 큰 힘이 됐다. 우울하고 슬플 때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을 노트에 적으며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삶은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도 흘러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대학교 때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버스에서 만났을 때 그는 당시 대통령과 독도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나는 그 의견을 듣고 이렇게 물었다.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땐 정말 궁금했다. 어떻게 해야 정치, 역사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지 몰랐으니까. 책을 통해 나는 조금씩 세상을 이해했다. 역사, 경제, 문화, 예술에 대한 책을 읽고 나서야 뭐가 옳고 그른지 알게 됐다.


책을 읽으며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도 배웠다. 은유 작가의 『다가오는 말들』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한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작정 혐오하기는 어렵다. 서로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을 때 혐오는 쉽게 생기지만, 삶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공감과 이해의 여지는 꼭 생긴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책을 통해 내 삶은 분명히 달라졌다. 단순히 지식이 쌓여서가 아니라, 이제는 나를 똥멍청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지식의 양에서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 생각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조금은 생겼다.


책을 통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글을 쓰며 내 마음을 정리하고, 나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는 그렇게 조금씩 나아졌다.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유혹에 끊임없이 휘둘리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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