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드르륵. 믹서기 소리가 아침의 적막을 깨운다.
눈을 뜨자마자 주방으로 향했다. 손에 든 건 사과 한 조각, 얼려둔 비트 몇 개, 그리고 시어머니께서 보내주신 토마토즙.
몸이 부쩍 무거워진 요즘이다. 허리는 시큰거리고, 피로는 쉽게 빠지지 않는다. 오늘은 대충 때우고 쉬어야지 마음먹었는데, 어젯밤 아들의 말이 문득 되살아났다.
“엄마, 비트 들어간 주스 내일도 또 해줘.”
그 한마디에 오늘도 믹서기를 돌린다.
친정엄마가 직접 농사지어 보내주신 비트는 쪄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토마토즙은 건강을 챙기라는 시어머니의 정성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주스는 가족의 건강을 위한 작은 루틴이 되었지만, 막상 만드는 사람의 건강은 조금씩 고갈되고 있다.
주스를 만든 김에 남은 멸치볶음과 우엉조림을 넣어 볶음밥도 만들었다. 냉장고 속 반찬 정리에는 이만한 요리가 없다. 요리도, 설거지도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들이 든든히 먹고 나가는 걸 보는 순간, 그 불편함은 금세 사라진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돌아온 집. 주방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싱크대에는 주스 컵, 프라이팬, 밥그릇. 아침 한 끼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설거지하다 문득, 숨이 턱 막힌다. 이게 피로인지, 무력감인지 잘 모르겠다.
남편이 무릎 인대 수술을 받고 집에 누워 지낸 지 벌써 보름째다. 수술 전엔 아이들 옷도 입혀주고, 목발을 짚고 잠깐씩 놀이터에도 나갔지만, 지금은 매트 위에서 하루를 보낸다. 거동이 불편하다는 건 결국, 내가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 멀리 안방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오늘 점심 뭐 먹을 거야?”
아침을 먹은 지 한 시간 반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고, 냉동실에서 안심 안돈을 꺼낸다. 오늘은 저녁 메뉴는 수육이다. 수육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늘 자신 없는 메뉴다. 열 번은 넘게 도전했지만 고기는 늘 질기거나 퍽퍽했고, 늘 냄새도 남았다. 간단하다는 레시피를 따라 해봐도 결과는 어딘가 부족했다. 오늘은 인스턴트팟을 꺼내 새 레시피를 시도해 보기로 한다. 유튜브의 조언을 믿어보자.
요즘 남편 삼시세끼를 챙기는 일도 꽤 큰 일이다. 장보기는 배달로, 식단은 냉장고 파먹기 전략으로 버틴다. 식단표까지 만들어가며 손품을 팔고 있지만, 이게 정말 돈이 모이는 길인지, 내가 고장 나는 지름길인지 헷갈린다.
그때, 다시 들려오는 남편의 말.
“여보, 안방에 와서 좀 쉬어. 한숨 자.”
조금 전까지 점심 메뉴를 물었던 사람이 쉼을 권한다. 고맙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다.
오늘은 남편의 무릎 실밥을 제거하러 강동까지 운전해 가야 한다. 병원에 다녀오면 바로 아이들 하원 시간이고, 놀이터 갔다와서 씻기고, 저녁을 차리고 나면 밤 10시쯤 되어 있을 것이다. 하루의 흐름이 이미 머릿속에 펼쳐진다.
그 순간, 남편의 마지막 한마디가 집안에 울린다.
“자기야, 조금 있다가 엄마 온대.”
어머님이 오신단다.
...그래, 오늘 수육. 이번엔 반드시 성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