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분가 이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수아 Mar 23. 2024

당신은 나의 아픈 사랑 (2017.3.22)

어머님께 다녀오면 자꾸 몸살이 난다. 몸살 약을 먹고 괜찮으면 다음날 오전에 또 가고, 어제처럼 낫지를 않으면 퇴근한 남편 차를 타고 같이 간다. 어제도 그랬다. 그런 날은 내 몸 약한 걸 아시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많이 마르신 우리 어머니!


어제는 탁하고 무거운 내 몸을 맑히기 위해 샤워를 오래 했다. 물소리와 내 울음소리가 섞여서 그 소리에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18세에 시집간 어머니가 보였다. 장애인 남편과 삼 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젊은 아낙이  보였다. 습관으로 굳어진 독설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했던 어머니도 보였다. 얼마나 울화가 심했으면, 얼마나 상처가 깊었으면, 어머니는 그리 독한 말을 내뿜으며 사셨을까?  세상에서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히고 울렸던 어머니를 모시며 살았던 17년도 스쳐갔다. 늘 뒤에서 숨어 살았던 형님의 건강한 모습도 지나갔다.


어머니는 정말 나쁜 분이다. 나를 그리도 괴롭히시던 분이 분가 후에는 왜 나를 그리도 이뻐하셔서 나를 이렇게 매일 울리고 계신 걸까. 어쩌라고, 울보인 나를 어쩌라고... 매일 병실에서 나를 기다리시고, 내 앞에서는 그 무섭다는 통증도 한 번 보이질 않으셨다.  통증이 나를 무서워하고 있는 걸까?


내 남편의 가장 아픈 사랑이 내 사랑이 되었다. 그래서 남편은 어머니를 포기할 수 없었으리라. 어머니를 한 번도 모셔보지 않았던 형수가 모시라고 해서 어머니를 모신 게 아니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자식만 바라보고 사셨던 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살고 싶었던 거였다. 그래서 결혼 6년 후쯤인가, 이러다가 내가 정신 병동에 입원할 것 같다는 내 말에도 끄떡하지 않고 "형수가 모시지 못하면 내가 모실 수밖에 없다. 난 이혼은 해도 어머니는 포기 못 한다"는 모진 말을 해서 내 가슴에 대못까지 박았던 사람이었다. 시누님 이혼으로 그 아이들을 돌보시느라 잠시 우리와 떨어져 사셨을 때, 우리 집으로 다시 들어오고 싶어 하시는 걸 그러시라고 말씀드린 건 나였다. 돌아보아도 돌아보아도, 어머님을 모신 건 내 선택이었다. 어머님께 들었던, 상견례까지 마친 여자와 헤어진 이유를 난 묻지 않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고 싶다는 이 남자의 제안을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오케이를 바로 했던 나와 달리.


어머니와의 긴 인연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어머님 고통에 내가 울고 있고, 어머님이 안 계신 이 세상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난 어머님을 사랑하고 있다. 어머니는 내 남편의 어머니여서 '어머니'가 아니다. 오로지 내 어머니인 것이다. 그걸 남편도 알고 어머니도 알고 우리 아이들도 알고 있다.


※ 시어머님은 그해 6월에 소천하셨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