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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비 Jul 20. 2024

멜랑콜리아의 신은 늘 유쾌하다

한낮의 열기가 식지 않은 건물 옥상은 무더웠다. 옥상 가운데 펼친 이동식 스크린이 습도 높은 바람에 펄럭였다. 그때마다 싸구려 빔프로젝터가 쏘아 보낸 화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스크린 앞을 분주히 오가는 원담과 세 남자들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있었다. 그 순간 옥상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감색 경비 모자와 유니폼을 입은 건물 경비 김 씨였다.

“저기, 원 씨. 이러면 곤란하잖어?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계속 전화가 온다고.”

매와 월계관 문양이 새겨진 경비모자를 고쳐 쓰는 김 씨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펄럭이는 이동식 스크린을 잡아매던 원담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여기서 이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울한데 그런 소리까지 들으니 더 우울해지네요. 멜랑콜리아!”

시큰둥한 원담의 대답에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쩝쩝 입맛을 다시던 김 씨가 또 한 번 경비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게 뭔 지랄들이여! 저, 원 씨! 한번 더 항의 전화 들어오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어.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알아서 해!”

말을 마친 김 씨가 옥상 출입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원담은 간신히 고정한 이동식 스크린을 쳐다봤다. 좌우 수평은 고사하고 위아래 평행도 맞지 않아 화면 속 건물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그 앞에 깔아놓은 지저분한 녹색 부직포와 녹슬고 상처 난 접이식 캠핑 테이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꼬락서니를 보며 원담은 이보다 더 한심하고 우울한 풍경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4년 전. 그리스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하늘길과 뱃길이 막혔다. 코로나19 때문이었다. 감염병 대유행은 격리와 거리 두기를 동반했다. 공식적으로는 격리와 거리 두기였지만 현실적으로는 고립과 단절이었다. 고고학과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학비가 저렴한 그리스 유학길에 올랐던 원담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선언과 함께 기약 없는 볼모 생활을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의 아슬아슬한 삶은 원담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만난 것이 바로 ‘멜랑콜리아교’였다. 처음에는 우울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공동체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울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이며 순수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종교 집단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가르침에 깊이 동화된 후였다.
학업도 중단 한 채 멜랑콜리아교의 우울에 깊이 빠져들었던 원담은 팬데믹이 종식되어 한국으로 돌아오자 스스로 한국 교구를 설립하고 멜랑콜리아교를 전파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스에 있는 교단 본부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한국 교구를 설립했음을 알리고 묻지도 않은 전도의 성과도 시시콜콜 알렸다. 교단 본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울하면 대체로 무기력한 법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단 본부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한 계기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동양의 미개척지에서 홀로 우울의 전파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 교구는 물론이고 멜랑콜리아 교단 전체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의식이 그렇게 준비됐다. 운명처럼 만난 조선시대 비급을 통해 알게 된 인류의 기원을 밝히고 바로잡을 의식! 한국 교구뿐만 아니라 멜랑콜리아 교단 전체를 인류사에 확실히 새겨 넣을만한 빅 이벤트가 될 것을 원담은 의심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제단의 꼬락서니가 영 한심하고 수준 이하였지만 말이다.
생각에 잠긴 원담 옆에서 캐리어를 뒤지며 부스럭거리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원 사제님, 이건 어디에….”

여행용 캐리어에서 밀폐용기를 꺼내던 남자 하나가 원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담은 밀폐용기를 건네받아 찬찬히 살폈다. 토막 난 고등어였다. 밀폐용기 뚜껑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 흘려 쓴 글씨가 보였다.

‘우울증 걸린 고등어.’

원담은 들고 있던 밀폐용기를 접이식 캠핑 테이블 가운데에 내려놓으며 다 죽어가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육해공 몰라요? 육해공! 몇 번을 말해! 그 순서라고! 땅 것이 가장 아래, 바다 것이 가운데 하늘 것이 젤 위라고! 홍동백서, 조율이시도 아니고 육해공 달랑 하나인데 그걸 못 외워요?”

원담은 치밀어 올랐던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밀폐용기를 건네던 남자뿐만 아니라 나머지 두 명의 남자들도 혹시 ‘우울의 뚜껑 열린 폐급 진상쇼’가 시작되는가 싶어 잔뜩 긴장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원담이었지만 우울이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감정이 폭발하면 180도 딴 사람으로 변해 말 그대로 지랄발광을 해댔다. 그것이 바로 ‘우울의 뚜껑 열린 폐급 진상쇼’였다. 원담이 벌이는 우울의 뚜껑 열린 폐급 진상쇼는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보다 죽겠다고 협박하는 걸 견디는 게 몇 배는 더 힘겹고 무섭다는 똑똑히 보여주는 악몽 같았다. 말리고 말리다가 오히려 지쳐 죽을 것 같은 끝나지 않는 자책과 자학과 협박의 연속 공격! 그래서 정말이지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멜랑콜리아니 뭐니 하면서 우울해하는 것과 달리 기분만 맞춰주면 원담은 술도 잘 사주고, 이런저런 신기한 이야기를 풀어놔서 재미있게 어울릴 만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육해공을 구해와라 눈물을 어째라 하고 하도 닦달해서 더 이상 어울리다가는 험한 꼴을 보게 될 것 같아 그동안 즐거웠다고 작별을 고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놈의 욕심이 문제였다. 이별주 한 잔 얻어먹자고 옥상에 따라 올라온 것이 화근이었다. 이상한 제단을 차리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하인처럼 막 대했다. 기분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 명의 남자는 억지춘향으로 원담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내가 몇 번을 말했어요? 이건 멜랑콜리아의 신, 우울 그 자체를 불러오는 신성한 의식이라고요. 태어나길 원치 않았지만 태어나버린 우울한 존재! 우울이 본성인 존재! 이름난 예술가, 철학자, 기업가들 모두 우울에 처박혔던 인물이었어요. 우울이 인류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겁니다. 그걸 오늘 우리가 불러내려고 하는 거고요. 이건 인류 탄생의 비밀을 벗기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거예요. 우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요!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좀 이해가 돼요?”

원담의 심각한 말투에 남자가 계속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눈치를 살폈다. 남자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원담이 더없이 피곤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다음 거!”

한껏 쪼그라들었던 남자가 주눅이 들어 더욱 허둥거렸다. 원담이 제 손바닥을 두들기며 한 번 더 재촉했다.

“육! 땅 것이요! 땅 것!”

그제야 남자가 옆에 있던 캐리어를 뒤적거려 두 번째 밀폐용기를 꺼냈다. 밀폐용기 뚜껑에는 ‘우울증 걸린 돼지의 삼겹살’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원담은 두 번째 밀폐용기를 받아 첫 번째 밀폐용기 아래에 내려놨다. 원담의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재빨리 세 번째 밀폐용기를 꺼내 원담에게 내밀며 말했다.

“공! 하늘 것입니다!”

남자가 내민 밀폐용기 뚜껑에는 ‘우울증 걸린 닭의 대가리’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원담은 남자의 손에서 밀폐용기를 낚아채 캠핑 테이블의 가장 윗줄에 올려놨다. 밀폐용기 세 개를 나란히 배치한 원담이 뒤를 돌아봤다. 밀폐용기를 건네주던 남자는 여전히 원담 옆에 어색하게 서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애꿎은 스크린과 빔프로젝터를 만지며 뭔가 분주한 척했다. 원담이 옥상 바닥이 꺼질 만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울증 걸린 육해공인 거 틀림없죠?”

스크린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달려와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예, 예. 요놈들 구하느라 아주 애 먹었습니다. 전국을 다 뒤졌어요. 틀림없을 겁니다요. 예.”

남자의 뿌듯해하는 말투에 원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원담의 눈치를 보던 남자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먹이 잘 안 먹고, 딴 놈들이랑 못 어울리고, 한 구석에 짱 박히고, 저 뭐냐 눈깔에 생기가 없이 흐리멍덩한 놈들…. 그래도 딴 것들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저 우울증 걸린 고등어 구하는 게 엄청 어려워서… 그래서….”

남자의 말이 길어지자 원담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말을 끊었다. 머쓱해진 남자가 스크린이 아닌 빔프로젝터를 만지고 있는 남자 쪽으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남자의 머쓱한 표정을 보고 있던 원담이 바닥이 꺼져라 또 한 번 한숨을 내뱉고 캠핑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원담의 한숨 소리를 듣고 빔프로젝터를 만지던 남자가 제 곁으로 다가온 남자와 눈짓을 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다가오던 남자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캠핑 테이블을 바라보던 원담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시골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에서 베껴 온 비급이었다.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만난 건 말 그대로 운명이었다. 책 표지에는 한자로 ‘每 亂 去 利 我(매란거리아)’라고 적혀 있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매일매일을 보내니, 날카롭게 예민해진 나만 남았다’는 뜻이었다. 내용을 슬쩍 살펴보니 조선시대 어느 이름 없는 선비가 남긴 비망록이었다. 책장을 넘기던 원담은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은 외국어인 ‘멜랑콜리아’를 비슷한 소리와 뜻의 한자로 바꿔 썼다는 사실이었다. 책의 중간쯤에 서양인에게 들어 알게 된 요상한 관습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것이 멜랑콜리아교의 유일신을 불러내는 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원담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가지고 있던 노트에 조심조심 옮겨 적었다. 지금 보고 있는 종이가 그날 베껴 온 노트였다. 원담은 정성껏 옮겨 적은 구절을 혼잣말로 읊조렸다.

‘푸른 눈의 도인이 말하기를 앞으로 300년 후 구라파의 다불유애치오라는 성 앞마당에서 하늘, 바다, 땅의 매란거리아에 걸린 세 가지 신물을 법도에 맞게 늘어놓고 그 위에 우울과 허세가 섞인 성수를 뿌리면서 기도하면 우울신명이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고 한다. 그리고 도인은 그 기도가 ….’
 
책이 쓰인 정확한 연대는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쯤으로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대충 300년은 되었을 터. 이 시점에서 자신이 이 내용을 알게 된 건 틀림없는 신탁이었다. 애석하게 제노바의 따블유에치오 건물에 직접 갈 수가 없어서 스크린에 띄운 빔프로젝터 화면으로 대신했다. 옥상에 잔디를 심는 것도 어려워 비슷한 색깔의 부직포를 깔았다. 테이블은 중고거래로 산 캠핑용 테이블. 그래도 어찌어찌 제일 중요한 신물은 제대로 구했다. 원담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책에서 말한 것과 좀 다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조선시대 하고 어떻게 똑같이 맞추나…. 300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든 될 거야. 우울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어쩐지 감이 좋아.’

원담의 맥 빠진 목소리가 또 한 번 옥상에 울렸다.

“세 가지 신물은 됐고, 제일 중요한 그거! 성수는 어떻게 됐어요?”

원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빔프로젝터를 만지고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점퍼 안 주머니에서 작은 물약통을 조심스럽게 꺼내 내밀었다. 원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확실한 거죠? 우울하지만 허세 쩌는 중 2병 남학생의 눈물 다섯 방울.”

물약통을 건넨 남자가 기세등등하게 원담 앞으로 한발 다가서며 말했다.

“확실하죠. 제 아늘 놈이 중 2 거든요. 요즘 시험 기간이라 엄청 우울해하더라고요. 공부에 관심도 없는 놈이… 웃기는 일이지요? 암튼 그놈이 하품할 때….”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됐어요.”  

원담이 이번에도 남자의 말을 가차 없이 끊었다. 물약통을 건넨 남자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빔프로젝터 곁으로 돌아갔다. 제 자리로 돌아온 남자가 제물을 구해온 남자를 곁눈질했다. 두 남자는 조용히 눈길을 주고받으며 또 한 번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종이를 보고 있던 원담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 됐어. 이제 시작하면 되겠어.”

원담이 종이를 접어 뒷주머니에 넣는 순간 옥상 출입문이 거칠게 열렸다. 옥상 위에 있던 네 명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쏠렸다. 촌스럽고 낡은 원피스를 입은 50대 중반의 아줌마가 요란한 꽃무늬의 핸드백을 손에 들고 숨을 헐떡이며 문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난닝구 차림으로 두꺼운 시사상식 책을 든 더벅머리 청년이, 그 뒤로 머리가 반쯤 벗어지고 꽉 붙는 스포츠 셔츠를 입어 살짝 나온 배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50대 초반 아저씨가 줄 지어 옥상 안으로 들어섰다. 50대 아저씨가 뒤를 보고 소리쳤다.

“빨리 와! 젊은 사람이 배 나온 나보다 더 헐떡거리면 어떻게 한대?”
“힘들어서 그러는 게 아닌 거 몰라요? 일부러 천천히 올라온 거 몰라요?”

째지는 목소리와 함께 검은 눈화장에 짧은 단발, 코와 입술에 피어싱을 하고 목덜미와 팔에 문신을 한 젊은 여자가 성큼 옥상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는 옥상에 펼쳐진 온갖 물건들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낯선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원담과 세 남자는 당황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먼저 들어온 50대 중반의 아줌마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 밑에 차오를 땀을 찍어내며 말했다.

“뭔 건물에 엘베도 없어. 한국 교구는 열악해도 너무너무 열악해. 아무리 우울해도 이건 아니잖아. 안 그래요 원담 사제님!”

낯선 사람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원담은 깜짝 놀라 대꾸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원담이 그러거나 말거나 원피스 아줌마는 옥상 위에 펼쳐진 풍경을 좌우로 훑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이고, 이 테이블 꼴을 좀 봐. 이건 해도 해도 너무너무 했다. 이게 뭐야 이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난닝구 청년도 아줌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접시도 아니고 밀폐용기라니… 정말 상식이 있는지 의심스럽네요.”

슬그머니 신물을 늘어놓은 캠핑 테이블 곁으로 다가온 배 나온 아저씨도 스크린을 손가락질하며 참견에 합세했다.

“이건 뭐래? 어디 사진이래? 가만 보자…. 거기네 거기. 제노바 따블유에치오! 직접 못 가면 거 화질 좋은 거라도 쓰지… 이거 어떻게 한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피어싱 한 여자가 배 나온 아저씨 옆으로 다가와 신발 끝으로 바닥에 깔린 녹색 부직포를 툭툭 걷어차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건 뭐예요? 잔디 대용이에요? 일부러 이런 거 찾아서 깐 거예요?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 몰라요? 이것도 능력이네….”

네 사람의 사정없는 지적질에 원담을 돕던 세 남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옥상 구석으로 물러났다. 가뜩이나 내키지 않는 일에 동원돼서 죽을 맛이었는데 낯선 이들이 나타나 휘저어대니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어쩔 줄 몰라하던 원담이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몇 차례 때렸다. 눈에 불이 번쩍이더니 제정신이 돌아왔다. 원담이 캠핑 테이블과 네 명의 불청객 사이를 막아서며 처절하지만 맥 빠진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당신들 뭐야!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지적질이야! 그리고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김 씨가 알려줬어? 뭐 하려고? 신고? 신고하려고? 응? 하…. 정말 우울하다. 멜랑콜리아!”

원담의 ‘멜랑콜리아’라는 탄식을 들은 네 명의 불청객이 동시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푹 한숨을 내쉬고 ‘멜랑콜리아’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이 장면을 본 원담이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놀라고 흥분해서 우울을 잊고 말까지 더듬었다.

“멜, 멜랑콜리아, 우리의, 우리의 멜랑콜리아를 알아? 어떻게 알아? 응? 당신들 정체가 뭐야?”

원담의 말에 난닝구 청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정말 우리가 오는 걸 몰랐어요? 문자도 메일도 전화도 받은 게 하나도 없어요?”

원담이 여전히 눈을 둥그렇게 뜨고 네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자 난닝구 남자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아시아 교구 일처리 수준을 보면… 상식이 있는 교구인지 정말 의심이 됩니다.”

그제야 원담은 며칠 전 스팸 처리해서 삭제해 버린 문자가 떠올랐다. 알아볼 수 없는 중국어로 된 문자. 당연히 피싱용 문자라고 생각해 가차 없이 지워버렸다. 그것이 실수였나?

‘그 문자가 저 사람들이 말하는 아시아 교구에서 보낸…?’

원담이 삭제한 문자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원피스 아줌마가 손수건으로 코 밑을 다시 찍어내며 말했다.

“너무너무 어처구니없다. 정말 엉망이야.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우리 앉아서 합시다. 거기 세 분 앉을 것 좀 찾아와요.”

원피스 아줌마의 말에 옥상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세 남자가 눈치를 보다가 한쪽에 겹쳐 쌓여 있던 플라스틱 의자 다섯 개를 가져와 늘어놨다. 세 남자가 다시 눈치를 보고 옥상 구석으로 피하자 불청객 네 명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원담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신물이 차려진 캠핑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원피스 아줌마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만족스러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머지 세 명의 불청객들도 한결 낫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이제야 살 것 같다. 너무너무 힘들었어 진짜…. 그럼 마저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그렇죠? 원담 사제님!”

원피스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아줌마와 세 명의 일행들은 멜랑콜리아 교단 본부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한국 교구에 문제가 발생하자 빠른 수습을 위해 외국 교구에 소속된 한국인 신도들을 수소문했고 그중 특별히 우울심이 두터운 사람들 넷을 골라 이곳에 파견한 것이었다. 네 사람의 행색을 둘러본 원담이 원피스 아줌마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멜랑콜리아 교단 본부에서 보낸 분들이라고요?”

믿을 수 없어하는 원담의 말에 배 나온 아저씨가 불룩 튀어나온 배를 긁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우린 죄다 유럽 멜랑콜리아 교구 신도들이지. 여기 여사님은 프랑스, 이쪽 난닝구 청년은 영국, 나는 이태리, 저쪽 피어싱 처자는 독일. 어째 안 믿는 눈치네? 이거 어쩐대? 원사제는 그리스에 있었지? 그러니 서로 볼 일이 없었던 거지.”

한숨을 푹 내쉰 원담이 짜내는 듯한 못소리로 물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믿을게요. 근데… 유럽 신도들이 도대체 여긴 왜 오신 거냐고요?”

원담의 피곤한 듯한 말투에 피어싱 한 여자가 정색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린 GK에요 GK! GK 몰라요? 골키퍼냐고? 어이없어서 정말. ‘글루미 나이트(Gloomy Knight)’! 멜랑콜리아 교단을 수호하고 우울증을 이 세상 끝까지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무기력하고 우울한 전사들! 우리가 그거라고요. 이래도 몰라요?”

원담이 GK라는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피어싱 한 여자가 두 손을 하늘로 쳐들어 올리며 탄식을 했다.
 
“와, 진짜 어떻게 해야 하죠? 이렇게 화내다가 기분 상쾌해지면 어쩌죠? 한국 교구 진짜 대박 아니에요? 이렇게 전혀 모르는 것도 능력이죠? 그렇죠?”

원피스 아줌마가 만류하듯 피어싱 한 여자를 향해 손을 뻗어 위아래로 저었다.

“아유, 좀 참아. 진정해! 너무너무 황당하지만 어쩌겠어. 여긴 아직 교세가 미미한 개척 중인 나라인데. 그나저나 원담 사제님!”

원피스 아줌마가 이번에는 여전히 스크린과 자신들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원담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거, 꼭 해야겠어요? 장로들 말로는 너무너무 위험할 수 있다는데.”

원피스 아줌마의 이야기를 들은 원담의 눈이 더욱 커졌다.

“뭐, 뭘 말이에요? 뭘 해요?”

원담이 더듬거리며 반문하자 원피스 아줌마가 손수건으로 코 밑에 맺힌 땀방울을 찍어내며 말했다.

“멜랑콜리아의 신 강림 의식이지 뭐긴 뭐야.”

버티고 서 있던 원담이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 그걸… 어떻… 어떻게?”

원피스 아줌마가 한번 더 코밑을 수건으로 찍어내며 대답했다.

“신물 하고 성수 찾겠다고 그 난리법석을 치고 편지까지 보냈는데 어떻게 몰라? 교단 본부에 소문이 쫙 퍼져서 우리 글루미 나이트를 보낸 거잖아. 너무너무 위험하니까 꼭 말리라고.”

의자에 앉아 있던 원담이 몸을 바로 세우며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뭐래도 합니다. 멜랑콜리아의 신을 모셔와서 쾌락으로 물든 이 한국 땅을, 우울로 정화할 겁니다. 아리랑이나 불러대는 촌스러운 ‘한’의 정서를, 헤어날 수 없는 우울로 바꿔놓을 겁니다. 어떤 나라도 할 수 없었던 그걸 제가! 여기! 한국에서! 할 겁니다! 해낼 겁니다! 한국을 멜랑콜리아 교단의 새로운 성지로 만들 겁니다!”

원담의 짜증 나는 절규를 듣고 있던 난닝구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대꾸했다.

“쯧쯧….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상식적으로! 멜랑콜리아의 본산인 그리스에서도 아직 가보지 못한 경지인데…. 아무리 그리스에서 입교했다고 해도 그걸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이건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예요. 상식적으로….”

난닝구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어싱 한 여자가 받아 챘다.

“이게 배교 행위라는 걸 몰라요? 멋대로 금지된 의식을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건 파문되고도 남을 이단 행위인 거잖아요? 몰라요? 신실하고 우울한 멜랑콜리아라면 절대 그럴 수 없는 거 아니에요? 하면 안 된다는 거 몰라요? 정말?”

원피스 아줌마가 코 밑을 수건으로 또 찍어내며 난닝구 남자와 피어싱 한 여자를 손을 들어 달랬다.

“사제님! 들었죠? 이건 너무너무 위험한 일이야. 그 마음은 내가 잘 알지! 잘 알았으니까 이제 마음을 바꿔. 그래야 우리도 조용히 다시 돌아가고 사제님도 열심히 다시 우울에 매진할 수 있잖아? 그러면 모두모두 너무너무 좋은 거잖아. 안 그래요? 그거 해봐야 좋은 꼴 절대로 못 볼 거라고 장로들이 다들 그러더라고.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도 했어. 나보다 우울심이 높은 사람들이 그러는데 어째? 믿어야지. 안 그래?”

옥상 구석에서 상황을 살피던 세 명의 남자들이 눈짓을 하며 슬금슬금 옥상 출입문 쪽으로 움직였다. 원담 하나로도 벅찬데 못지않게 이상한 사람이 한꺼번에 네 명 더 늘어난 상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황당하고 복잡한 일에 말려들어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신물을 구해 왔던 남자가 출입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 찰나 원피스 아줌마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거기 형제님들! 도움이 너무너무 필요해. 와서 여기 이것들 좀 정리해요. 이렇게 어설픈 걸로 의식을 치러봐야 아무 소용없다니까. 게다가 우울증 연구의 본진인 진짜 제노바의 따블유에치오 앞 뜰도 아니고…. 이 조잡한 사진이며…. 이건 처음부터 너무너무 말이 안 되는 거였다고. 사제님! 아셨죠? 마음이 너무너무 힘들겠지만 어쩌겠어. 내가 하자는 대로 고쳐먹어야지. 응?”

옥상에서 달아나려던 세 명의 남자들이 쭈뼛쭈뼛 스크린과 제물을 늘어놓은 캠핑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잠자코 있던 원담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불청객 네 명과 다가오던 세 명의 남자가 깜짝 놀라 원담을 쳐다봤다.

“이제 알았어요. 이건 시험이군요! 제 우울한 신념을 알아보려는 멜랑콜리아 신이 내린 고난의 시험!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죽기 아니면 우울해지기 정신으로 끝까지 가겠습니다! 형제들! 저 사람들 막아요!”

불청객들과 원담 사이에 낀 남자 세 명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원담이 주먹을 불끈 쥐어 그들을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우울해서 뚜껑 열리면 나, 뭔 짓을 할지 몰라! 알지? 오늘 오랜만에 그 꼴 한번 볼 거야?”

원담의 말에 기겁한 세 명의 남자들이 재빨리 불청객 쪽으로 달려들었다. 세 명의 남자들은 글루미 나이트 네 사람의 팔과 다리를 바닥에 널려 있던 폐 전선을 이용해 의자에 꽁꽁 묶었다. 교단 본부가 직파한 글루미 나이트를 이런 식으로 대하면 큰일 난다고 호통을 쳤지만 남자들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단 본부보다 코 앞에 있는 원담의 우울의 뚜껑 열린 폐급 진상쇼가 더 끔찍했다. 남자들이 바삐 움직이는 동안 원담은 차려놓은 의식의 준비물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원담의 가슴이 우울함으로 차올랐다.

‘절차에 따라 진행만 하면 돼. 우울한 세계, 인류 탄생의 비밀, 역사의 새 장을 드디어 여는 거야!’

원담은 우울함에 기진맥진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무기력한 자세로 신물을 차려놓은 캠핑 테이블 앞에 두 발을 가지런히 모아 섰다. 뒤쪽에 묶여 있는 글루미 나이트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소리소리를 질러댔다. 원담이 구석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세 명의 남자들에게 턱을 까딱해 보였다. 남자들이 부리나케 달려들어 그들의 입에 바닥에 굴러다니던 현수막, 목장갑, 양말을 쑤셔 박았다. 글루미 나이트들은 고함 대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마침내 경건의 시간이 찾아왔다. 원담은 두 손을 최대한 무성의하게 모아 가슴께에 올리고 기도문을 읊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우울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선사한 자를 사함과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다만 쾌락에서 구하소서. 모든 우울과 무기력과 절망의 권세가 멜랑콜리아의 신께 영원이 있기를 기원하오니….”

원담은 기도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 중얼거리며 신물이 든 밀폐용기의 뚜껑을 열고 그 위로 물약병에 담긴 성수를 조심스럽게 뿌렸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태초의 우울이고 마지막의 우울이신 멜랑콜리아의 신이여! 이제 이곳으로 강림하시어 우리에게 우울과 무기력과 절망이 젖과 꿀처럼 흐르고, 사자와 아기양이 함께 절망하여 동반 자살하는 낙원의 동산을 완성해 주소서! 육해공의 신물과 우울과 허세가 섞인 성수를 바치오니 부디 현현하소서! 현현하소서! 현현하소서!”

원담의 기도가 끝남과 동시에 이동식 스크린을 비추고 있던 빔프로젝터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영상이 사라진 이동식 스크린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펄럭였다. 빔 프로젝터의 빛이 사라진 옥상에는 주변 가로등 불빛만 침침하게 남았다.

‘실, 실패인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감이 그렇게나 좋았는데…. 역시 별 볼 일 없는 변두리의 엉터리 같은 사제의 욕심이었나? 부질없는 짓이었나?’

원담이 참담한 눈길로 침침한 옥상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뒤쪽에는 더러운 재갈을 물고 의자에 묶인 글루미 나이트 네 명이 몸을 뒤척이며 그야말로 발광하고 있었다. 실망한 원담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세 명의 남자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옥상에서 달아나려고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바스락….콰드득….뿌득, 뿌득…. 콰직!”

뭔가가 무너지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원담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 발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검은 발이 캠핑 테이블을 밟아 뭉개고 있었다. 원담의 시선이 엄청나게 큰 발을 따라 위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털은 없지만 북실북실해 보이는 검고 굵은 다리가 나타났다. 검은 다리는 원담의 키 높이를 지나면서 두 갈래가 하나로 모아지며 허리를 이뤘다. 허리부터 시작된 몸통은 역삼각형으로 뻗어 나갔다. 원담 키의 두 배쯤 되는 높이에 떡 벌어진 어깨가 걸렸다. 어깨 양쪽에는 다리만큼이나 우람하고 탄탄해 보이는 팔이 솟아나 있었다. 어깨 위에는 좌우로 찢어진 텅 빈 눈동자와 소름 끼치는 스마일 미소를 짓고 있는 입, 하늘로 뻗은 뿔이 솟은 얼굴이 달려 있었다. 너무 놀란 원담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의자에 묶인 채 무시무시한 존재의 출현을 라이브로 지켜본 글루미 나이트들도 순간 얼어붙었다. 옥상 출입문 손잡이를 잡은 세 남자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무시무시한 두 눈이 굳어버린 사람들을 훑어봤다.

“여긴 어디야? 니들이 나 불렀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정말 심심했는데 우리 지금부터 완전 신나게 놀자! 응!”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상쾌 발랄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옥상에 울려 퍼졌다. 옥상 위의 사람들이 또 한 번 경악했다. 사람들이 놀라든지 말든지 무시무시한 존재는 캠핑 테이블을 완전히 짓밟고 폴짝 뛰어나와 제 자리에서 방방 뛰며 떠들기 시작했다.

“나 완전 기대돼! 뭐 하고 놀까? 재미있는 데 좀 데려가 줘! 밤새 신나게 놀 수 있는데 말이야. 왜 그러고들 있어? 안 갈 거야? 빨리 가자! 어머 쟤들은 누가 묶어 놨어? 자자, 내가 풀어줄게.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 한번 크게 치고 시작할까? 왜 가기 귀찮아? 그럼 그냥 여기서 놀까? 대신, 완전 끝내주게 노는 거야! 오케이?”

무시무시한 존재의 손가락 튕김 한 번에 글루미 나이트들을 묶고 있던 폐 전선들이 끊어졌다. 손 발이 자유로워진 글루미 나이트들이 구역질을 하며 입 속에 박혀 있던 더러운 재갈들을 뱉어냈다. 무시무시한 존재도 존재지만 풀려난 글루미 나이트들에게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한 세 명의 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란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원담의 목소리가 뚫고 나왔다.

“도, 도대체 당신, 당신은 누구세요? ”

어울리지 않는 발랄함으로 옥상 위를 방방 뛰어다니던 무시무시한 존재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휙 돌아섰다. 좌우로 찢어진 텅 빈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원담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존재가 원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런이런 놀 생각만 하다가 소개하는 걸 깜박했네. 쏘리. 나야 나. 니가 부른 거 아니니? 멜랑콜리아의 신! 짧게 ‘멜님’이라고 불러! 이제 됐지? 그럼 너 지금부터 분위기 좀 띄워볼래? 싫어? 그럼 내가 할까? 뭐 할까? 노래 하나 할까? 같이 할래? 자자 텐션 이빠이 올리고! 지금부터 분위기 업! 업!”

‘멜님’이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옥상 한 복판에 거대한 스피커와 스크린, 조명이 나타났다. 화려한 조명이 옥상을 어지럽게 비추고, 어마어마한 음악 소리와 번쩍거리는 뮤직비디오가 화면에서 쏟아져 나왔다. ‘멜님’은 그 가락에 맞춰 흥겨운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낡은 옥상과 건물이 무너질 듯 울려댔다. 제 흥에 취한 ‘멜님’은 가끔 옥상 위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함께 하자는 듯 손을 까닥거렸다. 세 명의 남자들은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고, 글루미 나이트들은 저희들끼리 수군대고 있었으며, 모든 사태를 불러온 장본인인 원담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혼란과 반전이 계속되는 열대야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저게, 저게 저렇게 방방 뛰는 게 우리의 신 일리가 없어. 거짓말, 악몽이야!’

망연자실 서 있던 원담이 바닥에 짓이겨져 있던 신물을 집어 들어 ‘멜님’을 향해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유쾌한 악마! 즐거운 사탄! 하이텐션의 어둠은 물러가라! 우울의 신 멜랑콜리아의 이름으로 명하니 쾌락의 무저갱으로 돌아갈 지어다!”

원담의 돌발 행동을 보고 있던 글루미 나이트들이 작게 안타까움의 탄성을 질렀다.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추던 ‘멜님’이 물건을 던지며 소리를 지른 원담을 향해 돌아섰다. ‘멜님’의 어깨는 그 와중에도 음악에 맞춰 들썩이고 있었다. ‘멜님’이 뒤쪽에 따로 모여 서 있는 글루미 나이트들을 보면서 물었다.

“얘 왜 이러니?”

이 난장판을 미처 다 설명할 수 없었던 글루미 나이트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멜님’이 다시 원담을 쳐다봤다.

“너 내가 맘에 안 드니? 그러니? 왜?”

원담이 이번에는 산산조각 난 캠핑 테이블을 주워 ‘멜님’을 향해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멜랑콜리아의 신이 너처럼 그렇게 하이텐션 일 수 없어! 우울의 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존재만으로도 우울해서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그런 위엄과 권능을 가진 존재일 텐데…. 넌 절대 아니야! 넌 유쾌한 악마, 사탄이야!”

‘멜님’의 표정 없는 얼굴이 심각해졌다. ‘멜님’이 손가락을 튕기자 쿵작거리던 음악과 영상이 멈추고 옥상에는 조용함이 찾아왔다. ‘멜님’이 오른손으로 제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너…, 뭔가 오해를 한 것 같다. 아니면 멍청하던가.”

‘멜님’의 목소리 톤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누가 봐도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났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글루미 나이트들이 순간 긴장하는 것 같았다. 세 명의 남자들은 여전히 이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빠져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멜님’의 말에 원담이 도리질을 하며 소리쳤다.

“오해라고? 날 속일 순 없어! 넌 절대 멜랑콜리아의 신이 아니야! 내가 잘못 불러낸 거야. 엉터리 의식이 엉터리 신을 불러낸 거라고! 이렇게 유쾌할 순 없어! 니가 진짜라면 지금 당장 이 세상을 우울의 동산으로 바꿔봐! 어때. 못하겠지? 그럴 수밖에. 넌 멜랑콜리아의 신이 아니니까. 이럴 순 없어. 내가, 내가 어떻게 준비한 건데! 이렇게 망칠 순 없어! 없다고!”

원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멜님’이 별안간 검고 커다란 주먹을 들어 ‘탁’하고 원담을 내려쳤다. 마치 모기나 바퀴벌레를 때려잡는 것처럼. 보고 있던 글루미 나이트는 물론이고 세 명의 남자들이 헉 소리 지를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멜님’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바닥에 널브러진 원담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행히 손바닥에 맞은 모기나 바퀴벌레처럼 뭉개지고 짓이겨지지는 않은 온전한 모습이다. ‘멜님’이 원담을 때려잡은 손을 다른 손으로 툭툭 털었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다 죽었네 다 죽었어. 재미도 없는 게 고집만 세서 원…. 맞다면 맞는 줄 알고 놀면 되는데…. 뭐 그리 말이 많아 말이….”

‘멜님’이 휙 고개를 들어 수군거리고 있던 글루미 나이트들을 쳐다봤다.

“니네도 못 믿니?”

글루미 나이트들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꺼번에 소리쳤다.

“믿고 말고요, 제 모든 우울을 걸고 믿습니다. 그럼요!”

‘멜님’이 이번에는 옥상 출입문을 향해 살금살금 걷고 있던 세 명의 남자들을 쳐다봤다.

“니네는?”

세 명의 남자들이 번개에 맞은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자리에 엎드린 남자들이 연신 절을 하듯 허리를 굽혔다. 표정이 없는 ‘멜님’의 얼굴이 비로소 흡족해 보였다.

“진짜 우울한 건…. 우울한 것만 가지고는 안돼. 즐겁고 행복하고 유쾌한 게 있어야 우울이 더 절실하고 극대화되는 거야. 배 불러봐야 배고픈 고통을 알고, 희망이 있어야 절망이 더 커지는 것과 같은 거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유쾌, 통쾌, 상쾌 발랄한 거지. 내가 이래야 이 세상이 우울해진다는 걸, 쟤는 그걸 몰라. 아, 몰라, 몰라. 이 분위기 어쩔 거야. 거기 니들 네 명! 이리 와서 분위기 좀 띄워. 거기 세 명은 술이라도 내와! 없어? 그럼 사와!”

‘멜님’이 손가락을 튕겼다. 세 명의 남자들은 근처 편의점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주머니에는 빳빳한 5만 원권 현금 다발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남자들은 신바람이 났다. 편의점으로 들어간 남자들이 닥치는 대로 냉장고에 있던 술들을 봉투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양손 가득 술이 든 비닐봉지를 든 남자들이 다시 옥상으로 소환되어 왔다. 술을 보자 텐션이 오른 ‘멜님’이 소리쳤다.

“그럼 음악 다시 스타~트!”

비트 높은 음악과 영상, 조명이 다시 쿵작거리고 번쩍 거리기 시작했다. 건물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엄청난 난리통에 놀라 골목으로 쏟아져 나와 옥상 쪽을 쳐다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멀리서 경찰 순찰자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시각 경비원 김 씨가 옥상 출입문 너머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손잡이는 굳게 잠겨 돌아가지 않았다. 뒤에 있던 누군가 김 씨에게 오함마를 내밀었다. 김 씨가 사정없이 문을 향해 오함마를 휘둘렀다. 하지만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세 명의 남자들이 양손 가득 사들고 온 술병들을 바닥에 가지런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의 공포와 경악을 깡그리 잊은 그들의 어깨가 비트를 타고 들썩였다. ‘멜님’의 성화에 옥상 한가운데로 나와 억지 춤을 추고 있던 글루미 나이트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원피스 아줌마의 신호에 배 나온 아저씨가 ‘멜님’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우리 ‘멜님’ 춤솜씨가 뭐, 와, 완전! 여기, 시원한 맥주, 맥주 한 잔 하셔야지! 그렇지 그렇지, 단숨에 쭈욱!”

한창 흥에 겨워 춤추던 멜님이 배 나온 아저씨가 권한 맥주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배 나온 아저씨가 또 한 번 ‘멜님’을 부추겼다.

“저기 ‘멜님’! 노래방, 노래방이 빠지면 섭하지요. 응? 노래방!”

‘멜님’이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스피커 옆에 ‘음영’에서 나온 최신 노래방 기계가 나타났다. 배 나온 아저씨가 마이크를 ‘멜님’에게 건네고 번호를 눌렀다.

‘7, 4, 6, 3’

흥겨운 전주가 시작됐다. 배 나온 아저씨가 먼저 호들갑을 떨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멜님’도 ‘땡벌’, ‘땡벌’하고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다. 설렁설렁 춤을 추고 있던 나머지 세 명의 글루미 나이트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씩 흩어졌다. ‘멜님’은 배 나온 아저씨의 리드에 푹 빠져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들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술을 사 온 세 명의 남자들도 취기가 올라 흥에 겨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옥상으로 흩어진 세 명이 글루미 나이트들이 주머니에서 분필을 꺼냈다. 그리고 ‘멜님’의 위치,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낯선 무늬를 그려 넣었다. 첫 번째 무늬를 그린 후 자리를 옆으로 이동해 또 다른 무늬를 그려 넣었다. 분필을 집어던진 원피스 아줌마가 ‘멜님’의 정면을 보고 자리에 섰다. 난닝구 남자가 ‘멜님’을 가운데 두고 원피스 아줌마와 마주 보는 자리에 섰다. 피어싱 한 여자가 두 사람이 자리 잡는 것을 확인하고 뚜벅뚜벅 ‘멜님’과 배 나온 아저씨가 몸을 부비며 춤추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마이크를 들고 있던 ‘멜님’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노래에 취해 있던 ‘멜님’이 깜짝 놀라 피어싱 한 여자를 쳐다봤다. 그 순간 함께 노래하고 춤추던 배 나온 아저씨가 ‘멜님’의 왼팔을 붙들었다. ‘멜님’의 정면을 보고 있던 원피스 아줌마가 성의 없이 말했다.

“이건 정말 너무너무 아니야. 그러니 돌아가요. 원래 왔던 곳으로. 거기서 신나게 놀아요. 잘 가요.”

말을 마친 원피스 아줌마가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자 옥상 위 밤하늘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소용돌이 가운데로 빛이 쏟아지더니 양팔을 붙들린 ‘멜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멜님’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바닥에 그려진 문양에서 쏟아져 나온 힘과 글루미 나이트 두 명의 힘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아냐, 아냐! 나 여기가 좋아! 여기서 놀래! 혼자 노는 거 정말 지겨워! 니네들하고 놀래! 보내지 마! 보내지 마! 제발!”

울고 불고 떼쓰는 ‘멜님’을 무시한 채 네 명의 글루미 나이트들이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멜님’ 위로 쏟아지는 불빛이 점점 더 밝아지더니 ‘멜님’의 검은 몸뚱이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왜 불렀어? 지들이 불러 놓고 얼마 놀지도 못했는데 돌려보내? 너무 한 거 아냐? 야, 야! 저기 술은 다 마시….”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멜님’의 몸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 빛줄기가 사라지고 밤하늘에 나타났던 소용돌이도 사라졌다. 동시에 ‘멜님’이 소환했던 온갖 유흥 도구들도 한꺼번에 사라졌다. 한창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졌던 세 명의 남자들도 거짓말처럼 사라진 술병들과 술기운 때문에 서로를 쳐다보며 어색해하고 있었다. 옥상 출입구 너머와 골목에서 구경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자리에 쓰러졌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배 나온 아저씨가 손을 탁탁 털며 원피스 아줌마 쪽으로 다가왔다.

“아이고 여사님 고생했네! 저기 난닝구 청년도, 피어싱 처자도. 다들 애썼네 애썼어.”

원피스 아줌마가 손수건으로 코 밑을 찍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감당 못할 거라고 했잖아. 말을 너무너무 안 들어 처먹어. 우울한 인간들은 이게 문제야. 인간이나 신이나 하여튼….”

피어싱 한 여자가 아직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원담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 어떻게 해요? 저렇게 그냥 둬요?”

난닝구 남자가 흠흠 거리며 말했다.

“상식적으로 그건 안되죠. 처벌을 받든 치료를 받든 본부로 데려가는 게 상식적으로 맞죠. 조사하고, 조사받고. 그다음에 장로들이 상식적으로 결정하겠죠. 벌을 줄 건지 용서를 해 줄 건지. 그게 상식이지. 안 그래요?”

배 나온 아저씨가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난닝구 남자에게 말했다.

“자네가 맬래? 내가 매고 싶은데 말이야~ 허리 때문에. 자네도 알잖아. 배 나온 사람들 허리 안 좋은 거.”

난닝구 남자가 들고 있던 시사상식 책을 배 나온 아저씨에게 건네고 널브러진 원담을 들쳐 업었다. 피어싱 한 여자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세 명의 남자들을 발 끝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요?”

원피스 아줌마가 손수건으로 코 밑을 찍어내며 대답했다.

“그냥 둬. 본 게 있으니 말도 못 할 거고, 말한들 누가 믿어주나…. 새로운 한국 교구 담당 사제가 알아서 하겠지. 자자, 그럼 갑시다.”  

옥상 출입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뒤에 오함마를 손에 든 경비원 김 씨와 동네 사람들이 정신을 잃은 채 차곡차곡 쓰러져 있었다. 원담을 업은 글루미 나이트들이 조심조심 건물을 빠져나왔다. 글루미 나이트들이 골목을 지나 동네 입구 공영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낡은 승합차 한대가 차단기를 들이받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요란한 경보음이 밤거리에 울려 퍼졌다. 멈칫하던 승합차 속도를 높여 인천 공항 방향으로 달아났다. 갑작스러운 가속에 승합차의 배기구에서 시커먼 가스가 쏟아져 나왔다. 뒤 따라 달리던 차의 운전자가 배기가스를 피해 차선을 바꾸며 욕을 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불쾌지수 만땅인 열대야의 밤이었다.




* 특별히 한 줄 요약 해드림

   : 우울의 신이 소환됐다.

     덥고 끈적거리는 열대야의 밤.

     한심한 사람들이 모인

     지저분한 변두리 낡은 건물 옥상으로.

     끝 모를 신의 폭주가 시작된다.

     감당할 수 있을까?

     눈 앞에 펼쳐진 극한의 우울을,

     끝 없는 무기력을,

     답 없는 찌질함을.


* '오늘비'의 뱀발 한뼘

   : 오자마자 보낸 건 좀 그랬어.

     인간적으로 막잔은 먹이고,

     노래방 점수 확인은 하고,

     댄스 피니쉬는 보고 보냈어야….


(제목 이미지는 '뤼튼 AI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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