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퇴직 특공대

by 오늘비

“그러니까…. 짤릴 수 있게 도와달라? 안 짤리는게 아니고?”

의자에 앉아 종이컵에 든 믹스커피를 마시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커다란 몸집을 떠받친 의자가 작고 위태롭게 보였다. ‘희망퇴직특공대’라는 명패가 붙은 사무실 안에 있던 세 명의 남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등학교 친구로 만나 40년 동안 한 동네서 얼굴 맞대고 산 사이였다. 비슷한 시기에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회사에서 나온 아픔도 어쩌다 보니 함께 겪었다. 허무한 마음을 달래려고 작당모의한 끝에 작고 허름한 사무실을 하나 차렸다. 직장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후배들에게 희망퇴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컨설팅해준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앞세웠다. 하지만 실상은 아내와 아이들 눈치 보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중년 아저씨들의 아지트였다. 아지트의 좌장 격인 반야씨가 흠흠 목을 가다듬고 재차 물었다.

“저기…. 우리가 회사에서 짤… 아니 퇴직한 건 맞는데….”

말을 하던 반야씨가 목이 메는지 제 앞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은 반야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 놀리는… 그런 건… 아니지? 그치?”

다 마신 종이컵을 솥뚜껑 만한 손에 쥐고 이리저리 구겨대던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놀리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제가 부탁드리는 건… 이게 좀 복잡한데요… 못해서 짤리는 게 아니라… 잘하지만 짤린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겁니다.”

반야씨 옆에 앉아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 있던 서진 씨가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

“잘하지만 짤리는 건 뭐래? 이래도 저래도 짤리고 싶은 거면 아예… 사표를 쓰는 게 안 나아?”

제 손 안의 구겨진 종이컵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눈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해 보였다.

“사표는… 안됩니다. 시작하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래서 선생님들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오늘 이 사무실을 발견한 건… 아무래도 운명 같습니다. 제 발 저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낼 것 같은 남자의 표정을 보며 서진 씨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 앉은 재구 씨는 혼잣말로 연신 ‘아이고, 아이고, 이를 어째’하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재구 씨가 반야씨를 보고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위아래로 작게 끄덕였다. 사정이 딱하니 도와주자는 신호다. 반야씨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렇게 정이 많아서야 원…. 그러니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호구 소리나 듣다가 회사에서 쫓겨났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에 앉은 서진 씨를 쳐다봤다. 서진 씨는 눈을 질끈 감고 팔짱을 낀 채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었다.

‘아이고 저놈의 고집… 하여튼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내가 사장이래도 미워서 제일 먼저 짤랐겠다.’

서진 씨가 저렇게 나올 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설득한다고 말 섞어봐야 본전도 못 찾는다. 저러다가도 뭔가 마음에 꽂히는 구석이 하나라도 있으면 앞 뒤 안 가리고 달려들어 수선을 피워댈 게 뻔했다. 지금은 그냥 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일단은 자세한 사정을 더 들어보는 것이 먼저였다. 앞뒤 없이 내던진 ‘잘해서 짤리고 싶다’는 말만 가지고는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짤리고 싶다는 말만 듣고 척척 도와줄 수는 없잖어? 뭘 알아야 도와주든가 말든가 하지. 형들한테 하소연한다 생각하고 일단 전후 사정 얘기를 좀 자세히 해봐.”

말을 마진 반야씨가 이번에는 양 옆에 앉은 서진 씨와 재구 씨를 번갈아 돌아봤다.

“우선 세부사항을 좀 더 파악해 보자고. 그래야 이 양반 ‘니즈’를 우리 역량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지 없는지 ‘의사결정’ 할 수 있지 않겠어?”

반야씨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서진 씨가 ‘그럴싸한 대기업 월급쟁이 말투 또 나왔네’하는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재구 씨는 반야씨의 말에 살짝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지, 그렇지’를 연발했다. 반야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퇴직특공대’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출입문 옆 서랍 맨 윗 칸에서 A4용지 여러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다음 칸을 열어 볼펜 서너 자루를 집어 들었다. 테이블로 돌아온 원담 씨가 옆에 앉은 두 사람에게 볼펜 한 자루와 A4용지 몇 장씩을 나눠줬다. 그 사이 재구 씨가 녹차 티백이 담긴 종이컵을 가져와 남자의 앞에 내려놨다. 반야씨가 또 한 번 ‘흠, 흠’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볼펜 꼭지를 눌러 ‘딸칵’ 소리를 냈다. 종이 맨 꼭대기에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니즈 조사’라고 쓴 반야씨가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일을 하는지 들어보자고.”

남자가 종이컵에 담긴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일을 합니다.”

남자의 대답에 서진 씨가 눈을 번쩍 뜨고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울? 재밌고 신나는 게 아니고?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어? 틀림없어 우릴 놀리려고 온 놈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까지 남자를 동정하고 애처롭게 생각했던 재구 씨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우울한 걸 치료하고 우울하지 않게 기분 전환시켜 준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일부러 우울하게 만든다는 건 금시초문이네. 뭐 좋다고 일부러 우울해져. 진짜 그런 일이 있어?”

반야씨가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A4 용지 위에 내려놨다. 반야씨의 얼굴에도 의심의 빛이 어려 있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남자가 당황하며 의자에 걸쳐진 커다란 몸집을 들썩였다.

“그렇죠.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하실 만합니다.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죠. 하지만 그 믿을 수 없는 일이 제 일입니다. 세상을 우울하게 만드는 거. 사람들을 우울에 빠지게 만드는 거. 더 심각하고 더 깊고 지독한 우울을 퍼뜨리는 거.”

남자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서진 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회사… 이름이 뭐야?”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서진 씨의 까칠한 목소리가 또 한 번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저봐! 말 못 하는 거. 없으니까 말 못 하지. 지어 내려니까 안 되는 거라고. 거기까지는 생각 못하고 왔어?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딱 눈치챘다니까…. 그러게 저 ‘희망퇴직특공대’라는 명패 좀 바꾸자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놀려먹기 좋잖아. 그걸 차일피일 미루니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나 당하지.”

서진 씨의 추궁에 남자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남자가 녹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입을 열었다.

“연옥주식회사요.”

남자의 대답에 반야씨와 재구 씨가 동시에 물었다.

“연옥주식회사?”

서진 씨의 까칠한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높아졌다.

“얼씨구. 희망퇴직특공대를 방문한 연옥주식회사 직원이셨구만. 몰라뵈서 죄송하네. 왜 저승주식회사랑 극락주식회사는 없고?”

서진 씨의 빈정거림에도 남자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승은 주식회사가 아니라 그룹입니다. 저승 시왕들이 경영하는 열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지요. 극락도 그룹이고요. 아홉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남자의 진지한 대답에 서진 씨가 기가 막히다는 듯 더 까칠하게 물었다.

“아… 그룹? 그럼 연옥주식회사는 어디 계열사래? 지옥? 극락?”

서진 씨의 어이없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의 대답은 여전히 진지했다.

“양 쪽 모두에 속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정확히 말하면 두 그룹에서 공동 투자해서 설립한 별도 법인입니다. 각 그룹에서 처리하기 애매한 일들을 저희가 맡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는 일이 들으신 것처럼 좀 유별납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구 씨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저 뭐냐. 그렇지, 연옥…주식회사? 그쪽이 그 회사 CEO?”

끼어들어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재구 씨를 서진 씨가 째려봤다. 남자가 재구 씨 쪽을 쳐다보며 여전히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유, CEO라니요. 감히 저따위가…. CEO는 따로 계시고, 저는… 멜랑콜리아 사업본부 본부장일 뿐입니다.”

남자의 말에 재구 씨가 고객사 임원을 마주친 영업 담당자처럼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이고, 본부장님이셨구만. 높은 분인지도 모르고 이렇게 실례를….”

이 모양을 본 서진 씨가 참지 못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짓이야! 진짜 그런 회사가 있을 것 같아? 있어도 그 회사 본부장이 우리랑 뭔 상관이라고 무턱대고 굽신거려! 쪽팔리게 진짜!”

인사하느라 엉덩이를 뒤로 뺀 재구 씨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뭘 그렇게 화를 내? 본부장이라잖아 본부장. 알아놔서 손해 날 거 있어? 세상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대한민국은 네트워크, 인맥이 전부인데…. 안 그래?”

보다 못한 반야씨가 끼어들었다.

“둘 다 진정 좀 해. 손님 앞에서 왜들 이래?”

반야씨의 나무람에 두 사람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앉았다.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반야씨가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아무튼 그런 회사가 있다고 치고. 그 본부가 하는 일이 뭐야? 우울하게 만드는 거랬나? 좀 더 구체적으로…. 타깃은 누구고, 상품이나 서비스는 뭐야?”

남자가 종이컵에 남아 있던 녹차를 단숨에 마시고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려워지는 이야기라서….”

원담 씨가 손에 끼우고 있던 볼펜을 빙글 돌리며 달래듯이 말했다.

“업을 정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래도 쉽게, 최대한 쉽게. 천천히…. 오케이?”

남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어 단숨에 쏟아냈다.

“세상 모든 사람들 각각에게 필요한 우울한 생각, 우울한 일, 우울한 기분, 우울한 사건이나 사고, 우울한 풍경, 우울한 음악, 우울한 그림을 기획하고 창조하고 공급하지요. 때로는 맞춤형으로, 때로는 범용으로. 그래서 더 우울하고 더 더 우울한 사람, 더더 더 우울한 세상을 만드는 게 제가 맡고 있는 멜랑콜리아 사업본부의… 일입니다.”

재구 씨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서진 씨는 한심하다는 듯 천장을 쳐다보며 양쪽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남자의 말을 A4 용지 위에 받아 쓰던 반야씨가 물었다.

“타깃이 좀 모호하긴 하지만 아무튼 상품, 서비스는 알겠고. 근데 뭐가 문제길래 본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짤리고 싶네 어쩌네 하면서 호들갑을 떨어?”

빈 종이컵을 구기던 남자가 종이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심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자꾸 우울해져요. 그리고….”

원담 씨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리고 또 뭐?”

남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 쉬었다.

“뭔가 꽉 막힌 것처럼… 지금보다 더, 더, 더 우울하게가… 안되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서진 씨가 두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색없는 재구 씨가 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자에게 물었다.

“우울하면 됐지, 더 우울하게 만들어서 뭐 하려고? 거 뭐 좋은 거라고.”

남자는 구겨진 종이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이 세상에 원해서 온 사람… 있나요? 그냥 내팽개쳐진 거죠. 그래서 인간은 존재 자체가 우울한 거죠. 그러니까 인간이 우울해지는 건 타고난 본성이라고요….”

잠시 말을 멈췄던 남자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반야씨, 서진 씨, 재구 씨가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는 표정으로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울한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그 덕분에 인간의 문화, 예술이 이만큼 발전한 거니까요. 이름난 예술가, 철학자, 기업가들이 대부분 우울한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러니 더 우울해지면 더 뛰어난 것들이 나오지 않겠어요? 물론 빛이 있는 만큼 어둠도 있을 거예요. 화려해지는 만큼 무기력과 무의미의 골짜기도 깊어지겠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원래 우울한 존재니까 받아들여야지. 그게 본성에 맞는 일이니까 받아들여야지. 안 그래요?”

남자의 넋두리 같은 말을 들고 있던 재구 씨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고, 서진 씨는 ‘허허 참’을 연발하며 냉장고에서 꺼내 온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참을성 있게 들으며 메모를 하고 있던 원담 씨가 말했다.

“그러니까….”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축 쳐져 있던 남자가 슬며시 고개를 들고 말을 시작한 원담 씨를 쳐다봤다. 원담 씨는 남자의 말을 메모한 A4용지를 볼펜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정리를 좀 해보면…. 자네, 아니 우리 본부장님의 현시점에서의 ‘페인 포인트’는 ‘더 우울해지지 않는 거’고, ‘해결 방안’은 ‘더 우울해질 수 있는 방법’이 되겠네. 그렇지?”

남자가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수를 들이켜던 서진 씨가 여전히 못마땅한 말투로 쏘듯이 말했다.

“그런 걸로 뭘 고민해! 답이 다 나와 있는 걸. 우울한 것만 죄다 털어 넣으면 되는 거. 그게 뭐 어려워서 빌빌거려. 나, 참.”

생각에 잠겨 있던 재구 씨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서진 씨를 향해 물었다.

“그렇긴 하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재구 씨의 관심에 우쭐해진 서진 씨가 짐짓 점잖을 빼며 대답했다.

“그걸 일일이 말해줘야 아나? 간단해. 웃기고 재미있고 맛있고 행복하고 즐거운 걸 다 없애버리면 되는 거지. 어때?”

서진 씨의 말에 재구 씨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역시 기획통은 뭐가 달라도 달라!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봐. 거기 본부장님! 잘 들어봐. 서진이 저 친구 전략기획팀장 출신이거든.”

재구 씨의 말에 서진 씨가 짐짓 정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떠오른 웃음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티키타카를 듣고 있던 반야씨가 종이 위에 적은 것을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오케이, 오케이. 거기까지. 내가 세부 추진 사항을 몇 가지 정리해 봤어. 한번 들어봐. 흠, 흠. 문제 해결을 위한 세부 추진 방안 첫 번째…. 즐겁고 행복한 것들을 제거한다!”

말을 마친 반야씨가 남자를 쳐다봤다. 어두운 표정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검토 후 드롭된 방법이에요.”

세 남자, 특히 서진 씨가 따지듯 물었다.

“드롭? 왜?”

남자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데… 상관없는 것들까지 너무 많이 없어져버려서….”

서진 씨가 답답하다는 듯 채근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한다고…. 희생은 감수해야지…. 그만한 배포도 없이 일을 하나?”

서진 씨의 거듭되는 채근에 남자가 단호한 말투로 대꾸했다.

“서로의 영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존중하고 지킨다. 연옥주식회사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 중 하납니다. 제 일은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업 본부의 것들을 제 마음대로 훼손하면 안 되는 겁니다.”

남자의 말을 듣고 있던 반야씨가 조금 전에 읽었던 문장 위에 가로로 줄을 그었다. 그리고 그다음 줄을 읽었다.

“알겠어. 그럼 세부 추진 방안 두 번째…. 우울한 일들만 계속 일어나게 한다!”

두 번째 방안을 들은 재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면 싫어도 우울해질 수밖에 없지.”

이번에도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것도… 득 보다 실이 많아서 드롭했습니다.”

남자의 말을 들은 서진 씨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시렁거렸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죄다 핑계뿐이구만….”

두 번째 줄에 가로 줄을 그은 반야씨가 그 아래 줄을 읽었다.

“세부 추진 방안 세 번째…. 우울한 말, 우울한 생각만 들게 한다!”

이번에도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온통 우울뿐이니 오히려 우울의 가치가 똥 값이 되는 부작용이…. 그래서 드롭….”

세 번째 문장 위에 가로줄을 긋는 반야씨의 손놀림에 신경질이 잔뜩 묻어났다. 거친 손놀림에 까칠하게 굴던 서진 씨도, 맞장구를 치던 재구 씨도 슬며시 반야씨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에는 한 없이 너그럽다가도 고심 끝에 내놓은 의견이 거절당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날카로워져 거칠게 변하는 반야씨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 방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구름이 잔뜩 낀 쓸쓸하고 심란한 날씨와 계절이 계속되게 한다!”

반야씨의 말투가 다소 거칠어진 것을 눈치챈 남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 세상이 우리 사업 본부만의 것도 아니고…. 그래서….”

반야씨가 들고 있던 볼펜을 탁 소리 나게 종이 위에 내려놨다.

“다섯 번째…. 뭘 하든 결과는 우울 하나뿐이게 만든다!”

반야씨의 격해진 말투해 당황한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저기… 저….”

반야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치며 매섭게 몰아붙였다.

“여섯! ‘우울 원 플러스 원’ 행사를 상시로 운영한다! 일곱! 꽝이 없는 우울 복권을 운영한다! 여덟! 우울 무료 증정 행사, 아홉! 전 국민에게 우울을 매월 무상으로 지급한다!”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놀라 입을 벌린 채 반야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진 씨와 재구 씨가 앉은 채로 반야씨의 양팔을 붙들었다. 양팔을 붙들린 반야씨가 일어선 채로 여전 씩씩거렸다.

“진정해! 진정해! 우리 본부장님이 좀 이해해. 이 친구 팀장 시절 새로 직속 임원이 된 입사 후배한테 보고를 24번이나 까였던 적이 있어서…. 그래서….”

반야씨의 팔을 토닥거리며 달래는 재구 씨의 말에 당황했던 남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야씨가 털썩 자리에 앉자 서진 씨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한병 꺼내와 뚜껑을 열고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반야씨가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서진 씨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졌다.

“죄다 안 된다, 못 한다 그러면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그럴싸한 방법이 필요했으면 돈 많이 받는 글로벌 컨설팅 펌이나 전문가를 찾아가지 왜 영세한 우리한테 와서 이 난리냐고?”

남자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정신을 차린 반야씨가 다소 진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문에 ‘희망퇴직특공대’라고 버젓이 써붙여놨는데, 그걸 보고도 왜 도와달라고 한 거야?”

남자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퇴직 특공대…라고 써 있어서….”

듣고 있던 재구 씨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뭐? 그게 어쨌길래? 희망퇴직 한 특공대란 뜻인데, 그게 뭐?”

남자가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희망퇴직이 그런 뜻이었나요? 저는 희망적인 퇴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특공대라고 생각해서 그만….”

반야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뚜껑이 열려 있던 생수병이 넘어져 테이블 위에 물이 쏟아졌다. 종이들이 물에 젖자 서진 씨와 재구 씨가 휴지를 가져온다 타월을 가져온다 호들갑을 떨며 사무실을 뛰어다녔다. 반야씨가 테이블을 내려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앙다문 이빨 사이로 내뱉듯이 말했다.

“뭐? 희망적인 퇴직 특공대? 그걸 진짜 그렇게 알았다고? 제 손으로 사표 쓰고 나왔다는 뜻인 희망퇴직인 걸 몰랐다고? 본부장이라며? 큰 그룹 계열사 다닌다며? 근데 그걸 그렇게 알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물어봤지? 우리 놀리는 거 아니냐고? 정말 아니야? 진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와, 미치고 팔짝 뛰겠구만.”

남자가 황당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큰 몸집을 버티고 있던 의자가 그 바람에 뒤로 벌렁 넘어졌다. 허겁지겁 의자를 바로 세운 남자가 테이블에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제가 스트레스가 심해서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테이블에 쏟아진 물을 휴지로 닦아내던 서진 씨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게 죄송으로 끝날 상황인가? 회사에서 등 떠밀려 나와 심란한 사람들끼리 집에서 눈치 보지 말고 뭐라도 해보자고 사무실 얻고 그럴싸한 명패까지 단 건데. 참사도 이런 참사가 없지. 우리를 또 한 번 죽이는 거지 이건.”

남자에게 우호적으로 굴었던 재구 씨마저 태도를 냉담하게 바꿨다. 테이블을 닦던 재구 씨는 남자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들으라는 듯 구시렁거렸다.

“초상집 와서 권주가 부른다더니 딱 그 꼴이네. 아이고 정말 어이없어서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네. 절로나!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흥얼흥얼 즐거운 콧노래가 절로 나와 절로! 우리 본부장님의 그 개떡 같으신 오해 덕분에 우리 꼬라지만 아주 우습게 됐어. 참 잘 된 일이지. 저~엉말 잘 된 일이야.”

큰 덩치를 최대한 움츠리며 허리를 굽히고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서, 선생님! 방금 하신 말씀! 다시 한번만!”

테이블을 닦던 손을 멈춘 재구 씨가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그렇지, 역시 대단한 본부장님이네. 우리 같은 것들 기분이 더럽든 말든 뭔 상관이겠어. 이기적으로 지 듣고 싶은 말, 몇 번이고 듣는 게 먼저지. 이런 것도 몰랐으니 우리가 등 떠밀려 쫓겨나 이 모양 이 꼴인 거지. 안 그래? 못난 것들 깨우쳐 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오. 감사! 또 한 번 기가 막혀서 어깨춤이 절로 나고 콧노래가 절로 납니다요 본부장님, 예, 예!”

재구 씨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가 손뼉을 쳤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세 사람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이거였어! 바로 이거였어! 역시 해답은 항상 그곳에 있었어. 보는 방법이 틀렸던 거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들! 역시 특공대였어요!”

반야씨와 서진 씨, 재구 씨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사무실 안에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나더니 남자를 휘감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은 입을 벌린 채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반야씨가 제 볼을 꼬집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의 볼도 꼬집었다. 정신줄을 놓고 있던 서진 씨와 재구 씨가 비명을 지르며 반야씨의 손을 밀쳐내고 자신들의 볼을 감싸 안았다.

“쓰읍. 꿈은 아니었구먼.”

사내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정체 모를 남자의 어이없는 오해가 남긴 상처가 세 사람의 가슴속에 깊이 파여 있었다. 상처가 깊어도 허기는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근처 백반집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믹스 커피잔을 든 채 사무실로 돌아온 세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연기처럼 사라졌던 남자가 사무실 가운데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과 행색이 달랐다. 화려하고 요란한 옷차림에 머리는 알록달록 염색되어 있었다. 열 손가락 모두에 크고 작은 반지를 끼고 있었고, 목에는 굵은 체인으로 엮은 금 목걸이가, 끈을 죄다 풀어헤친 부츠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에는 우스꽝스러운 메뚜기 눈 모양의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었다.

“형님들! 정말 보고 싶었어!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쏠게! 완전 맛있는데 알거든! 먹었어? 그럼 밥 대신 술 한 잔 제대로 살게. 내가 정말 고마워서 그래! 땡큐, 땡큐! 그리고 지난번에 쏘리, 쏘리!”

일주일 전과 달리 부담스럽게 방방 뛰는 남자를 보며 서진 씨가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을 듯 달려들며 물었다.

“너 이 자식! 왜 또 온 거야? 뭐가 아직 부족해? 너 정체가 뭐야? 사람이야? 귀신이야?”

방방 뛰며 사무실을 돌던 남자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의 커다란 몸집에 짓눌린 작은 의자가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남자가 발을 까닥거리며 대답했다.

“이런 거 알려주면 안 되는데. 내가 형님들한테는 고마워서 특별히 오픈한다. 나 사실 신이야. 신. 영어로 지, 오, 디. 갓!”

잠자코 있던 반야씨가 화를 참지 못하고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겨 남자에게 던졌다.

“저, 저놈의 헛소리!”

종이컵이 날아가 앉아 있는 남자의 머리에 맞고 땅에 떨어져 굴렀다. 남자가 여전히 발을 까닥거리며 종이컵을 집어던진 반야씨를 쳐다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우리 형님! 아직도 화가 많이 났구나! 그럴 만 해, 그럴 만 해. 내가 미안해, 잘못했다니까. 오늘 확실하게 한 턱 쏠 테니까 제발 기분 좀 풀어! 알겠지? 연옥주식회사 멜랑콜리아 사업본부 본부장이자 멜랑콜리아의 신으로서 명예를 걸고! 응? 형님들! 이제부터 편하게 그냥 ‘멜’이라고 불러! 알았지?”

‘멜’이 손가락을 튕기자 구질구질한 좁은 사무실이 화려하고 폼나는 스테이지로 바뀌었다. 테이블이 있던 자리에는 최신 음향 기기가 설치되었고, 벽들은 모두 고해상도 스크린으로 바뀌어 신나는 영상으로 번쩍거렸다. 한 켠에는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바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의 안쪽 진열장에는 온갖 값비싼 술이 꽉 들어차 있었으며 솜씨 좋은 남자 바텐더가 셰이커를 들고 열정적으로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한참 셰이커를 흔들던 바텐더가 이번에는 바의 아래쪽에서 접시들을 꺼냈다. 세 사람이 깜빡 넘어갈 만한 최고급 요리들이 금세 한가득 바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반야씨, 서진 씨, 재구 씨는 뭐에 홀린 듯 바 쪽으로 걸어갔다. 바텐더가 내미는 값비싼 양주잔을 손에 들고 난 후에야 이것이 진짜라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멜’이 술잔을 높이 들고 소리쳤다.

“형님들! 건배! 오늘 먹고 죽자!”

취기는 오르지만 절대 취하지 않는 술을, 맛은 기가 막히지만 절대 배부르지 않는 안주와 함께 끝도 없이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셨다. 지치지 않는 몸뚱이로 춤을 추었고, 쉬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 환락의 와중에 ‘멜’이 세 사람에게 말했다.

“형님들 덕분에 더 더 더 우울하게 만드는 비밀을 깨달아버렸잖아. 진짜 우울한 건, 우울한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거야. 즐겁고 행복하고 유쾌한 게 있어야 우울이 더 절실하고 극대화되는 거지. 지랄 맞은 역설이지. 배 불러봐야 배고픈 고통을 알고, 희망이 있어야 절망이 더 커지는 것과 같은 거야. 내가 이렇게 유쾌, 통쾌, 상쾌 발랄해진 것도 그것 때문이야. 그래야 내가 공급하는 우울이 더 커지니까.”

잠시 말을 멈췄던 ‘멜’이 재구 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그날 저 형님이 ‘기가 막혀서 어깨춤이 절로 나고 콧노래가 절로 납니다요’라고 했을 때 그걸 깨달아 버린 거야. 명색이 우울의 신인데 말이야. 출장 종료 시간도 다 돼 가고 있던 터라 마음이 너무 급해서 인사도 못하고 돌아간 거야. 그다음부터는 설명 안 해도 알겠지? 완전 대박이야! 전 세계의 평균 우울감이 일주일 만에 10% 포인트 이상 올랐다고! 신규 우울도 없이 기존 우울만으로 말이야! 그 덕분에 CEO께서 특별 포상 휴가를 주셨어. 해 뜰 때까지 실컷 놀다 와도 좋다고. 그러니까 끝장나게 놀아보자고! 오케이?”

일주일 전에 느꼈던 분노와 배신, 의심과 상심은 끝 모르고 높아진 텐션에 실려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다. 작은 사무실 안에는 이 세상 것이 아닌 흥이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멜’은 세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지난번처럼 검은 소용돌이에 휩싸여 사라졌다. ‘멜’이 소환했던 온갖 유흥도구들이 함께 사라지고 익숙한 사무실 풍경이 나타났다. 날이 밝고 있었다. 세 사람은 거리로 나왔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새벽길을 분주히 걷고 있었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세 사람은 24시간 해장국 가게로 들어갔다. 해장국 세 그릇을 주문했다. 세 사람은 까닭 없이 우울하고 짜증이 나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미리 세팅된 깍두기와 겉절이를 쳐다보고 있던 세 사람의 귀에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일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요. 우리가 멜랑콜리아 교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거라고요.”

‘멜랑콜리아’라는 말에 반야씨, 서진 씨, 재구 씨의 시선이 일제히 옆 테이블 남자에게로 쏠렸다. 우울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남자가 보였다. 옆 자리와 맞은편 자리에 앉은 세 명의 남자들은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신물 하고 성수를 찾는 일이 중요해요. 육해공! 아시겠어요? 그것만 찾으면 우리 인생이 바뀌는 거예요. 우울의 신과 하나가 되는 거니까. 끝도 없이 우울하게….”

귀를 쫑긋 세워 집중하고 있는 반야씨, 서진 씨, 재구 씨와 달리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위협적으로 변했다.

“뭐야! 반응이 왜 이래? 아 놔, 우울해서 뚜껑 열리겠네, 진짜…. 요즘 좀 뜸했지? 그지?”

시큰둥하게 앉아 있던 세 남자들이 바짝 긴장하며 허리를 곧추세우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주문한 해장국 세 그릇이 반야씨 일행이 앉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서진 씨가 카운터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 ‘그때처럼’ 한 병 줘요!”

반야씨, 서진 씨, 재구 씨는 자기 앞에 놓인 소주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조용히 잔을 부딪혀 건배를 했다. 해장국과 먹는 새벽술은 달디달았다. 순식간에 우울과 짜증이 날아간 것 같았다. 세 사람은 또 한 번 잔을 채워 건배를 했다. 옆 테이블의 남자들이 허겁지겁 해장국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계속 떠들던 남자가 계산을 하는 사이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 남자들은 각자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열린 미닫이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주일 뒤예요. 멜랑콜리아의 신을 부르는 의식을 치르는 날이. 늦지 마세요.”
“무슨 일 있으면 원담 사제한테 일단 먼저 전화하면 되는 거지?”
“네 그렇게 하세요. 매일매일 상황 보고 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짧은 인사와 함께 네 명의 남자가 제 갈길로 사라졌다. 미닫이 문 밖은 다시 조용해졌다. 반야씨, 서진 씨, 재구 씨가 빈 잔에 또 한 번 소주를 채웠다. 한 잔이 모자라서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반야씨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자식 불러내봐야… 감당 못할 텐데….”

서진 씨와 재구 씨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해장국은 줄어가고 테이블 위에 빈 소주병은 쌓여만 갔다.




* 특별히 한 줄 요약 해드림

: 멜랑콜리아의 신이 늘 유쾌해진 것은

전적으로 이 사람들 때문이었다.

너무 하찮아서 감춰졌던,

유쾌한 우울의 근원을 찾아가는

믿지 않아도 상관없는 이야기!

‘희망’에 현혹되지 마라.

‘퇴직’은 자비가 없으니까.


* '오늘비'의 뱀발 한뼘

: 세상은 하찮은 우연들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한 편의 부조리극.

이게 뭔 말이래?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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