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잘 보이진 않지만 가끔 거리에 있는 커피 자판기를 보면 '블랙커피'라는 메뉴가 있다. 블랙커피는 프리마와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고형화 시킨 커피가루와 물이 섞여 나오는 메뉴다. 그리고 설탕만 들어있는 '설탕커피' 혹은 '스위트 블랙커피', 그리고 프리마까지 다 들어간 '커피'가 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블랙커피를 뽑아 먹는 모습을 보고 따라먹어 봤다가 쓴 맛에 버리기도 했다. 그런 걸 왜 먹느냐며, 그건 어른들이나 먹는 거라는 핀잔도 들었다. 중요한 것은 항상 동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엄마 쪽이었기에 메뉴 선택도 엄마의 몫이었고 내가 '커피'라는 메뉴를 누를 새도 없이 그냥 '우유'를 선택하였다. 나중에 동전이 두둑해졌을 때에도 자판기 우유의 맛에 빠져 커피메뉴를 먹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블랙커피는 당연하고, 커피가 들어간 메뉴는 쓰고, 어른들이나 마시는 것이고, 우유 맛도 나쁘지 않으니까.
커피 전문점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나도 한번 커피를 마셔볼까 하는 마음에 스타벅스 매장으로 들어갔다. 눈에 들어온 대형 메뉴판을 훑어보았지만 '커피'라는 단어가 들어간 메뉴는 오늘의 커피와 아이스커피뿐이었다. 커피매장에 커피 메뉴가 딱 두 개뿐이라니. 그 밖에는 무슨 라테 무슨 프라푸치노 이게 무슨 메뉴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나는 어수룩해 보이지 않으려고 가장 긴 메뉴를 여러 번 읊으며 연습했고, 점원 앞에서 마치 맨날 먹어본 사람처럼 쭉 읊었다. 그렇지 성공이다.
"사이즈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나는 '큰 걸로 주세요'라고 하려다가 저기 위쪽에 Grande라고 적힌 것을 보고
"그랜드로 주세요"
라고 했다. 점원은 '그란데로 드릴게요'라고 정중히 정정해 주었다. Grande. 후에 찾아보니 이탈리아어라고 하는데 내가 이 발음을 어떻게 아냐고. 커피 한잔 주문하면서 조금 있어 보이려는 내 술수는 금방 들통이 났다.
처음 먹어본 프라푸치노가 이렇게 달고 맛있을 줄이야. 나는 그다음 날도 스타벅스에 가서 이것저것 메뉴를 시켜 보았고 스타벅스 방문 한 달 차쯤 가장 저렴해 보이는 오늘의 커피를 주문했다. 내가 그동안 먹은 게 커피가 들어간 메뉴인지도 모르고 드디어 '블랙커피'를 먹어본다며 설렜다.
처음 오늘의 커피를 한 모금 들었을 때 머리가 너무 아팠다. 꿀떡꿀떡 넘어가던 다른 메뉴들과는 달리 한 모금을 넘기기가 참 힘들었다. 쓴 맛이 입 안에 맴돌아 커피가 혀를 훑기 전에 목구멍으로 바로 넘겨야 했다. 어른들이나 마시는 음료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 마시지도 못하고 트레이에 슬쩍 두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그땐 아직 어른이 아니었나 보다.
그 뒤로 조금 지나서야 블랙커피인 아메리카노를 즐길 수 있었다. 너무 독해서 라테만 먹는다는 사람들을 보고 속으로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샷을 네 개 다섯 개 넣어 달라고 하며 사약 같은 커피를 마시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 '부심'을 부렸다. 프리마와 설탕이 들어간 커피랑 블랙커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왜 그때는 블랙커피를 마신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어른이라고 생각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