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과 분별력

엄마가 되게 해준 한마디

by 천둥

오랜만에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기말고사에서 답안지에 번호 하나만 쭉 찍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아이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괜히 풀었다가 성적이 더 안 나올까 봐 그랬단다. 그리고 아이가 천진한 얼굴로 묻더란다. 왜 시험을 못 본 걸로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찍은 걸로 야단을 치냐고. 그때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지나갔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아이는 항상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말했고, 시험을 보고 나서는 시험 못 봤으니 그리 알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성격이었다. 성적표를 받아보고는 한숨이 나왔지만 아이를 탓하지 않았다. 후배 부부는 아이의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꽤 너그러운 부모다. 공부야 잘하는 아이도 있고 못하는 아이도 있는 거니까.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걸 어쩌겠나, 그래도 항상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기특하게 여겼다. 이번에도 그렇게 넘어갈 뻔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이전 시험에서도 그렇게 한 줄로 찍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후배는 아이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게 되었고, 예사로 넘겼던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의 바람과 달리 몹시 허세가 있고 자주 거짓말을 했던 것이 드러났다. 이제 후배는 이 아이가 내가 아는 그 아이가 맞나? 의심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아니, 잘못된 것이기는 한가? 잘못이라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잘못이 아니라면 이 불편한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학교폭력으로 어떤 아이가 맞았다. 부모는 몹시 화가 났지만 상대방 아이를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에 공개사과와 반성문으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아이가 부모를 원망했다.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다고. 여기까지는 부모가 흔히 하는 실수이다. 아이가 용서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부모가 용서해버리면 아이는 분노를 해소할 길이 없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런데 아이 말이, 그 애 부모보다 내 부모가 더 능력 있는데 왜 그래야 하냐는 것이다. 여기서 능력이란 부자를 뜻하고 그러니 상대를 깔아뭉개버릴 수 있는데 왜 그러지 않았냐는 뜻이다.

그 말을 들은 후배는 바로 그거라고, 자신의 두려움이 그거라고 했다. 우리는 비슷한 서늘함을 종종 느껴왔던 것 같다.

돈이 최고라고 가르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이미 돈이 최고인 세상을 살고 있다. 성적과 능력만이 최고가 아니라고 가르쳤지만 아이는 어떤 방식이든 성적이 나은 쪽이 낫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후배의 아들도 그랬을 것이다. 좋은 성적을 받고 싶었지만 노력은 부족했을 것이다. 성적이 안 나올 것을 알고 나름 머리를 썼을 것이다. 그런 요령을 피울 줄 아는 자신을 기특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실은 나도 아이에게 요령을 권한 적이 있다. 뒤늦게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이제라도 수능을 준비해보자고 권했다. 단순한 문항을 공략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나머지는 찍으면 된다고 했다. 조금이나마 수능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나를 합리화했다. 우리는 그렇게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요령을 허용해왔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우리는 나름 아이들을 쪼지 않고 남들처럼 스카이를 외치지도 않았잖아. 우리는 사회규범을 지키고 성실하게 일하고 정의롭기 위해 애써왔어.

후배는 믿고 싶어 하지 않아 했지만 사실은 다 알고 있다. 우리도 그런 세상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우리 마음 한편에 내 아이가 그런 세상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속내가 있다는 것을. 게다가 아이들은 우리 품에서만 자라는 게 아니다. 3살만 지나면 친구라는 사회, 학교라는 사회, 그리고 진짜 사회에 나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세상을 만난다. 알바를 하는 편의점에서는 절대 주휴수당을 주지 않고, 사회복무요원이 되어서는 아이들 먹을거리를 빼돌리는 지역아동센터와 출장비를 빼돌리는 공무원들을 본다. 대기업 알바들에게는 정규직 사원도 하기 어려울 만큼 빽빽한 스케줄을 요구하고 그마저 서열을 두어 같은 알바생들끼리 관리하게 한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아이들은 세상이 위선 덩어리며 모순덩어리라고 느낀다.

아이는 이미 학교에서부터 공동체 정신은 대학에 갈 때 쓰는 물건이고 그마저도 장착하는 것이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버린다. 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자신을 자조하고 이미 인생이 끝장난 것처럼 군다.

그런 아이에게 나도 말하지 못했다. 공동체정신 없는 능력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있고, 네가 경험한 피해의식은 결국 공동체 정신으로 회복하게 될 거라는 진실을. 아마 처음에는 수험생 때여서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민할 때니까. 그 뒤에는 관계가 나빠질까 봐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점점 부모가 해야 할 진짜 이야기를 놓치며 살아왔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단원이 실수를 했을 때 절대 쳐다보지 않는 것을 훈련한다고 들었다. 누구보다 스스로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린 음이 들리는 순간 눈이 절로 가는 것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려면 엄청난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아이가 뭔가 실수를 하더라도 절대 야단치지 않았다. 식탁에서 유리컵을 깨뜨려도 놀라고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다치지는 않았는지 묻고 침착하게 치웠다. 엄마가 놀라면 아이는 더 놀라니까, 엄마로서 놀라지 않는 훈련을 했다. 속으로는 놀라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조심하지 그랬어, 라는 말도 절대 하지 않았다. 아이는 이미 자신의 잘못을 알고 몸을 움츠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수는 실수일 뿐이지, 잘못은 아니니까. 실수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런 내게 은근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내면 안 되는 거였다. 실수는 해도 괜찮지만, 어떻게 조심했어야 하는지를 가르쳤어야 한다. 어떤 곳, 어떤 자리에서는 평소보다 더 조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도 가르쳤어야 한다. 실수는 실수일 뿐이지만 때로 커다란 민폐나 실례가 되기도 해서 그럴 땐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는 것까지 가르쳤어야 한다. 어쩌면 아이는 자신의 실수를 엄마가 해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수 있다.

얼마 전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나은이가 동생들이 흘린 음료를 닦아주며 한 말이 화제가 되었다. 실수할 수 있어, 괜찮아. 누나가 닦아주면 돼, 모르니까 그럴 수 있어. 그런 말이 필요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 말은 그렇게 자신이 누군가의 친절과 배려를 받고 있고 나중에는 자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후배에게 나는 말해주었다. 아이에게 엄마가 어떤 것을 걱정하는지 정확하게 말해주라고. 아이들은 의외로 무엇이 옳은지 잘 모를 수 있다고. 지금 아이들에게는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후배도 내게 말해주었다. 아주 낮은 단계에서 단호히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분위기가 어색해져도, 관계가 일시적으로 나빠져도 허용하지 말아야 할 것은 허용하지 말라고. 어쩌면 그 분별력은 우리 부모가 먼저 가져야 한다고.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울고 떼쓸 때, 절대 화내지 말고 안 된다고 말하기.”

아이들이 심하게 떼쓰면 안 된다고 했다가도 조건을 달아서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면 안 된다. 한번 안 되는 거면 끝까지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부모가 안 되는 것을 허용하는 순간 아이들은 안 되는 게 아니구나, 떼쓰면 되는 거구나,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부모가 평정심을 가지고(이게 중요하다!) 끝까지 안 된다고 할 때 아이는 오히려 세상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안심한다고 한다.

아기 때는 그런대로 잘 지켰던 육아 원칙이었는데 아이가 크면서 완전히 잊고 살았다. ‘내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유치원 때 다 배웠다’ 던 로버트 풀검의 책 제목처럼 우리가 인생에서 알아야 할 것은 육아 때 다 배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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