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냐, 두려움이냐

엄마가 되게 해준 한마디

by 천둥

책을 내기로 한 출판사와 매끄럽게 진행이 잘 되지 않았다. 삐거덕거리는데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는 상태다. 이메일을 쓰려고 했지만 뚜렷하게 잡히는 게 없으니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잠을 설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냈었다. 우리 때는 수천 명의 아이들이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80여 명씩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나는 내성적이고 낯을 몹시 가렸기 때문에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지금도 3월이 되면 전국의 학생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걱정을 한다. 이제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4월 벚꽃이 피는 걸 보고서야 겨우 그 시름을 덜어놓는다.


아이는 자기 나이만큼 인간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3살이면 3명, 8살이면 8명 정도가 안정적이다. 10살이 되면서부터 자신의 주변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다.

내 아이가 어린 시절을 안정된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다. 3월이 되어도 어제 만난 바로 그 친구들과 계속 만날 수 있는 안정감 말이다. 학부모인 나도 안정되기를 바랐다. 충분히 예상되는 관계를 맺는 안정감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대안학교를 선택했다. 하지만 대안학교에 안정은 없었다. 대안이라는 것을 부모들이 일일이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쉴 새가 없었다. 다양한 의견과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면서도 점차 나아질 거라고 믿고 버텼다. 다양한 의견은 모아지지 않았고 다양한 그대로 뒤섞여 항상 휘청거렸다. 그러다 정말 이건 안 되겠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왔다. 아이를 일반 학교로 옮기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나를 말렸다. 이건 어른의 일이야, 아이를 어른의 일로 이리저리 옮기는 건 아닌 거 같아. 대안이 있기는 해? 아이에게 물어봤어? 물론 나도 두려웠다. 이미 내가 겪었던,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일반학교로 가는 것 말고 대안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안이 없어서 대안학교에 보낼 수는 없었다. 어른이니까 빨리 판단해주어야 한다. 어른도 어려운 판단을 아이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막다른 길에 서면, 예상치 않은 문을 만난다. 분명 없었는데 거기 문이 열린다.

“선택의 근거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읽고 있던 책에서 만난 문장이다.

이럴까 봐 저럴까 봐 하는 두려움과 아이와 학교에 대한 믿음과 사랑. 수많은 생각의 갈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딱 두 가지였다. 아닌 줄 알면서도 두려움을 갖고 대안이 없다고 머무는 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결정을 미루고 뭉개는 거다.

그 책을 항상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아무 데나 펼쳐서 수시로 읽으려고. 1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내 머리맡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뒤로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다. 그 책에서 얻어야 할 모든 것을 그 문장 하나로 다 얻었으니까.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면 분명해진다. 어떤 것이 나의 두려움인지, 어떤 것이 사랑에 기인한 것인지 정리한다. 그러면 미련 없이 선택할 수 있다. 펼쳐본 적 없는 그 책은 다만 거기 꽂혀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역할을 하고 있다. 식당에서 뭘 먹을지 10분이나 고민하는 선택 장애를 가진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선택의 기준이 되어줄 잠언을 만난 건 축복이다.

아이에 관한 선택에 힘이 되어주었던 문장이라면 내 일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도 괜찮지 않겠는가.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다짐하지만 수시로 아이는 나 자신보다 더 나 자신이 되어버린다. 일종의 영혼의 영역이랄까.


출판사에 쓸 메일을 생각하다가 잠든 날, 새벽에 깨어 나의 두려움과 사랑을 꼽아 보았다. 책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의 마음이 사랑을 넘어 두려움으로 변해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러다 못 내면 어쩌지, 아무 데도 안 받아주면 어쩌지, 작가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 숨이 턱밑을 받치고 올라왔다.

글을 쓴다는 건 흔적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머릿속에 남겨진 부끄러움, 모멸감, 수치심 등이 글이 되어 나오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흔적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지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해있다. 때로는 글로 써야만 했을 만큼 아팠던 고통마저 까맣게 잊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던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완성된 글은 어둠을 걷어내고 농축된 사랑의 알맹이로 남는다. 글을 쓴다는 건 그렇게 내 삶에 사랑을 만들기 위한 것인데, 스트레스받고 두려워할 거면 책을 안 내도 좋아.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치밀어 오르던 숨이 훅 뱉어졌다.

더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이메일을 썼다. 이제 이 문제는 내 손을 떠났다.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상관없다. 내가 얻어야 할 것은 다 얻었으니까. 그 책에서 얻을 것은 다 얻었던 것처럼. 내 책도 출판되건 아니건 머리맡에, 내 영혼의 머리맡에 놓일 것이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내 어린 시절 겪은 경험 때문에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다고 생각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건 나의 경험일 뿐이다. 내가 가진 성향과 내가 자라온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겪은 그 일을 내 아이만은 겪지 않게 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한풀이일 뿐이다. 결국 그것도 두려움이다.

대안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단지 개인적인 경험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것 말고도 내 경험 때문에 회피한 수많은 선택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이는 내가 아니다,를 되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또 쌓여 몸에 새겨진 이후에야 겨우 실천이 된다. 다 겪고 나서야. 하지만 이제라도 깨달은 게 어디냐.


하나만 더. 대안학교를 보낼 때는 대안 세상에 대한 자신의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대안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대안을 가진 분을 봤다. 우리말 지킴이 최종규 선생님. 아이들을 홈스쿨링으로 키운다. 그분은 숲을 샀다고 한다. 대안적 교육을 받기만 하고 다시 경쟁사회로 나가게 하는 게 아니라 숲에서 함께 대안적 삶을 꾸릴 거라고 했다. 물론 나중에 아이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런 대안 없이 대안교육을 받게 하고 경쟁사회밖에 선택지가 없는 것보다 훨씬 부모로서 책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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