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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Sep 27. 2021

명절 후유증


긴 추석 명절이 지났다. 이미 지난주에 지나간 명절 다시 끄집어 얘기하것은 아직 그 후유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직장인에게는 긴 연휴의 피로가(왜 때문에 긴 연휴는 더 피로한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아있고, 주부들에게는 시댁과의 이러저러한 갈등이(꺼진 불도 다시 보자가 아니라 꺼진 갈등도 다시 피우자 정신이다) 남아있다. 공간과 시간은 흘러 이미 빨간 날을 벗어났고 다시 내 집인데, 후유증은 일상 곳곳에, 감정 구석구석에 눅진하게 들러붙어 같이 사는 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가 않다. 직장이건 어디건 모이기만 하면 하소연인지 욕지기인지 모를 것들을 성토해대느라 바쁘다. 평년 같으면 귀경길에 오른 이들이 30%가 넘지만 올해와 작년은 10%로 줄었다고 하는데도 그렇다.

내가 주로 명절 후유증을 눈으로 확인하는 곳은 한의원이다. 평소보다 두 배는 손님이 많아 보인다. (하지 말라는 자식들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손목이나 무릎이 아픈 노인들과 가슴이 답답하다는(화병이라는, 우리나라에서만 발병한다는 바로 그 증세 말이다) 중년들이 대부분이다. 나도 예전에는 손님 증가에 한몫했다.    

  

‘예전에는’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결혼 연차가 꽤 되면서 시댁 문화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사실 나의 시댁은 크게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힘들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남의 집에서 며칠을 묵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예민한 성격의 내가 며칠씩이나 시어른들과 웃으며 지내는 일이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이런 내 사정과 달리 남편은 우리집은 정말 편하지 않냐고 우쭐대곤 했다. 시어른들은 다정다감하셨고 잘 먹는 음식이 있으면 바리바리 싸주곤 했으니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리 잘해줘도 시댁은 시댁이고 남의 집이다. 남의 집 아무리 편해도 내 집보다 못하다. 그런데도 남편은 피곤하다는 내게 뭐했다고 피곤하냐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하루는 날 잡아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 집에서 당신의 가족들과 잘 지내다 오는 내게 수고했다고 말해달라고. 한 것이 있거나 없거나 당신을 중심으로 한 환경에 놓여있었던 내게 감사를 표했으면 좋겠지만, 그런 마음은 스스로 우러나야 하는 것이니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마음에 없는 소리라도 좋으니 그저 수고했어,라고 말하라고.

떨떠름한 남편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말 같지도 않은 투정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 아직 신혼의 약발이 남아있었던 때여서 그런지 남편은 그렇게 했다. 순순히 는 아니고, 시댁 다녀온 날 저녁 내가 빤히 쳐다보면 할 수 없이 수고했어,라고 영혼 없는 한마디를 건넸다. 매번 나는 그 말을 받아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기특하다. 결혼해서 제일 잘한 일이 바로 그 말을 요구한 거다. 그래서 명절 후유증이 없느냐. 그건 아니다. 다만 감내할 이유를 모르겠는 억울함이 사라지고 감내할 만해졌다.

남편도 수고했다는 말 속에 조금씩 영혼기 시작했다. 형식이 만들어준 결과다. 자꾸 하다 보면 그 말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당연히 여겨지면 그 말의 의미를 담은 행동이 나온다.  

   

좋은 성공의 경험은 새로운 도전을 만들어낸다.

가끔 남편에게, 그러니까 가족에게만 할 수 있는 험담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내 의도와 달리 남편이 나의 잘잘못을 말하거나 자신의 다른 감정을 말하면 그게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오로지 내편을 들어주었으면 싶은 순간, 또는 내 말을 있는 그대로 수긍해주었으면 싶은 순간이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그랬구나, 라고만 해줘.

이렇게 내가 원하는 반응을 미리 정해줬다. 조금 다른 말을 할라치면, 그랬구나, 하라니까! 하고 남편의 입을 막았다.

이것도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은 그런 대화의 의미와 맥락, 순기능을 익혀갔다. 지금은 뭐든지 내가 옳다고 말한다. 좀 과하다 싶도록. 이제는 내가 그걸 잘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부끄럽게도. 사실은 내가 그런 줄도 몰랐다가 큰아이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왜 저래? 하고 반응하는 아이를 보며 깜짝 놀랐다. 딱 내 모습이었다.  

    

경청, 가만히 들어주기. 평가하지 않기. 내편이 되어주기. 가족이 해줘야 할 것은 이것뿐이다. 아니, 남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다른 가정에서 각기 살다가 잠시 잠깐 며칠만 함께 하는 명절에는 더욱 그렇다.

나의 시댁이 남들 가정에 비해 편한 이유도 바로 그거였다. 시어머님은 우리에게 항상 그러냐, 하신다. 며느리에게만이 아니라, 딸이나 아들에게도 그저 그러냐? 그랬구나, 하신다. 말하는 그대로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이신다. 남의 집, 남의 아들딸들이 부모에게 잘하는 이야기도 전하지 않는다. 그저 남들은 그렇구나, 우리는 이렇구나, 할 뿐이다.      

이번 명절에도 시어머님은 내 얘기에 그랬구나, 하셨고 남편은 집에 도착하면서 수고했어,라고 말해주었다. 그걸로 됐다. 냉동실에 쟁인 명절 음식이 사라질 즈음 명절 후유증도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덧.

그런 시어머님이 그렇구나를 못하는 대상이 있다. 바로 시아버지. 이런 게 바로 서열이 아닐까.

우리 시아버지, 내가 그렇군요, 해드려야지.

받은 게 많으면 이런 마음이 절로 생긴다.




사진출처 가족 소셜 멀어 검역 거품 - Pixabay의 무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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