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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 앞에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여섯번째 인터뷰, 유정

by 천둥 Mar 16. 2025

이번에도 어마어마한 사랑을 만났다. 기성세대는 독재에 맞서는 정의가 앞섰다면 지금 이들은(뭐라고 불러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언어를 찾을 수가 없다. 일단 호명하지 않은 채 비워두려고 한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을 사랑으로 품어서 정의가 실현되게 하려나 보다.     



유정(20대, 여, 작가지망생, 대전 서구)은 ‘사람의 삶에서 저항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다룬 소설을 쓰고 있다. 오랜 시간 공들였던 주제로 80% 정도 썼고 마무리되면 연재할 예정이다. 

그런데 계엄이 터진 것이다. 순간 그는 계엄이라는 말에 내가 아는 그 의미 말고 다른 의미도 있나? 생각했다. 분명 다른 의미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년이 온다>에서 본 계엄이라는 단어가 지금 튀어나올 리가 없잖은가.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계엄은 그 계엄이었다. 국회에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국회의원과 시민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부끄럽게도 그는 자신의 글이 걱정되었다. 

계엄은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가방을 뒤지고 그들이 정한 불온서적(그것이 시집일지라도)이 한권이라도 나오면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시대가 되는 거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하필(?)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은 저항하는 내용이고, 그들은 무슨 꼬투리라도 잡아서 자신을 끌고 갈지 몰랐다. 아직 쓰지도 않은 글 때문에 등단도 하지 않은 무명작가가 잡혀갈 걱정을 한다는 게 어이없을지 몰라도 유정은 심각했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냐마는 유정은 18년 만에 얻는 늦둥이로, 오로지 다치지 않고 안전한 것만이 효도라고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다른 건 몰라도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몸조심하며 사는 것으로 유일한 효도를 해왔는데, 어쩌면 계엄 때문에 불효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죽더라도 써야지. 반드시 끝까지 글을 써야지. 그는 주인공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소설을 쓰면서 유정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글은 작가가 쓰는 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야기가 작가를 만들어갔다. 

작가는 그저 받아 적는 사람이었다. 주인공 ‘산’이는 혼자 살아서 움직였고, 유정을 고통받는 이웃에게 다가가게 만들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그린피스, 군인권센터 등을 후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전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할 때도 그랬다. 산이라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 행동에 옮겼다. 주 1회라도 비건을 실천하기로 하고 목요 비건(주1회만이라도 비건)이 되었다.   



유정은 13살 때부터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꿈이 소설가라는 걸 밝히지 않으면 내가 부끄럽냐고 마구 화를 냈다. 그 정도로 그의 꿈은 단단했고,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캐릭터(자캐) ‘산’이가 너무 소중해서, 자캐 덕질에 심취해있었다. 산이 반지를 만들고 인형을 만들고 스티커를 만들었다.      

그의 간절함은 또 다른 덕질로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드라마 <장영실>에 나오는 ‘희제’라는 인물에 푹 빠져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장영실의 라이벌로 나오는 희제는 별을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는 영실과 같으나 재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유정이 좋아하는 장면은 10화에서 희제가 수운의상대(천문시계)를 보는 순간 자기 자신을 잊고 넋을 놓는 모습이다. 그 순간 열다섯 유정의 삶은 붕괴되었다. 이전의 유정은 죽었고,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희제가 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간절함이 크다는 건 어떤 고통인지, 그에 비하면 글을 좋아한다던 자신의 간절함은 얼마나 하찮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토록 큰마음을 품고 산다는 건 어떤 건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심하게 우울증이 왔다.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커서 이틀에 한번 꼴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쓰는 게 두려워서. 유정은 희제를 떠올리며 버텼다. 나보다 더 큰마음을 품은 희제도 끝까지 그 짐을 지고 갔는데 나도 이겨내야지.      

지금은 그저 글을 쓰고 싶다. 대단한 무엇이 되는 것보다 글을 쓰는 순간을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간절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쓰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 



이토록 길게 그의 간절함을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주인공, 산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가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하기 위함이다.      

그는 올해 학교를 잠시 휴학했다. 올해 안에 글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계엄선포 전 그는 매일 아침 엄마가 출근할 때 같이 도서관으로 가서 글을 썼다. 심혈을 기울여 5,000자를 쓰고 나면 하루해가 저물었다. 

지금은 글 쓰는 일을 멈추고 토요일마다 집회에 간다. 얼마 전 윤석열이 탈옥(!)한 후로는 매일 저녁 집회에 간다. 

그는 팔레스타인 연대집회에 갔고, 혜화역 여성 딥페이크 시위에 갔고, 충남대 탄핵집회에 갔고, 구미옵티컬 희망뚜벅이에 참여했다. 아직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서울교육청, 세종호텔 등에 가지 못한 게 부끄럽다.       

12월에는 시험기간이었고, 유정도 모든 과목이 매주 과제가 있어서 유난히 바쁜 첫 주를 보내고 있었다. 탄핵소추안을 앞둔 주말에도 해야 할 과제가 쌓여있었지만, 20센티짜리 솜인형 산이가 어찌나 신경 쓰이는지 책상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만일 오늘도 못가면 산이가 그를 작가로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과제를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지금은 깃발을 들고 대전집회에 나간다. 깃발에는 계엄 첫날의 비장함을 담아 '내 글 앞에 부끄럽기 싫어서 온 아마추어작가연합'이라고 썼다. 기수가 되면 절로 책임감이 생긴다. 서로 얼굴은 몰라도 깃발은 알기 때문에 오늘도 왔구나, 확인하고 안도하는 동료기수들 덕분이다. 또래라 그런지 지금은 많이 돈독해졌다. 집회가 끝나면 뒤풀이를 한다. 노래 세곡에 맞춰 신나게 깃발을 흔드는 거다.  

대전집회는 루틴이 확실해서 좋다. 발언 횟수도 정해져있고 행진 시간도 정해져 있어 4시에 시작해 6시면 정확하게 끝난다. 토요일 일정에 끼워 넣기 부담 없다.  참석한 사람들도 친절하고 진행요원들이 모든 것을 주시하며 챙겨주고 있어 내 집에 온 것 같은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지역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기후정의행진에 갔을 때 서울은 4만 명이 모였고, 다음해 세종에서는 4천명이 모였는데, 그 다음해 대전은 150명이었다. 그때 유정은 내 지역에 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여자로서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주최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거리’라는 공간이 이런 일을 할 수도 있구나, 일상성을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구나, 시위라는 게 사람들과 함께 하는 멋진 일이구나 깨달았어요." 



참가인원이 적다는 것은 익명성이 확보되기 어렵다는 큰 부담이 있다. 지금도 절대 모자와 마스크를 벗지 않고 매일 같은 옷과 가방을 드는 것으로 자신을 철저히 감춘다. 감춘다고 해서 넓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희망뚜벅이로 연대하러 갔다가 기후정의집회 주최자를 만나 대학생환경동아리를 소개받았다.  

작가가 되는 것 말고 다른 꿈도 생겼다. 민주노총 조합원이 되어 민주노총 배지를 달고 단결투쟁 머리띠를 두르고 싶다. 또 다른 동지들을 광장에서 뵙는 날을 꿈꾼다. 그가 간 모든 곳에 민주노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시민발언을 통해 노점상 투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 다른 사람들이 제각각의 방식으로 제각각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껏 보고 듣고 살아온 세계는 아직 좁고도 좁아 지금의 탄핵정국에 대해서도 무어라 정의할 수 없다. 더 많이 관찰하고 더 넓게 둘러보려 노력중이다. 

이번 광장으로 당장 대단한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누군가를 구하고 있”고, 내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남의 이야기, 소수자들에게 귀기울여달라는 말을 덧붙이는 걸 보면, 우리는 이미 동지를 얻었다. 광장이 있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투쟁할 것이고 죽을 때까지 투쟁”할 것이다. 

유정도 탄핵정국이 끝나면 다시 글을 쓰는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어디서 투쟁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달려갈 것이다. 많이들 그렇듯.      



사람 사는 이야기는 어쩌면 뻔하다. 계속되는 집회로 비슷한 발언들이 반복된다. 그렇다고 감동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같은 말을 할 때도 다르게 듣는다. 이런 감각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고 다시 듣는 과정 속에서 존중이 생겨난다. 유정의 글도 뻔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보고 듣고 쓰고 읽으며 다름을 알아채고 받아들이고 개별성을 발견하며 삶이 참 풍요롭구나 여긴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가 내게 소감을 물었다. 인터뷰이가 내 소감을 묻는 일은 처음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타고난 작가 앞에서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실은 말하는 내내 그랬다. 그저 기록이나 하는 내가 작가의 세계를 무슨 언어로 끌어다 전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작아진 내가 "매번 인터뷰를 마칠 때마다 이제 어떻게 쓰지? 내가 과연 쓸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라고 답했더니 그는 너무나 이해한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공감 받자 나는 다시 조금 커졌고, 쓸 수 있었다.  

    

쓰는 게 중요하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가 마치는 게 중요하다. 너무 잘할 필요는 없다. 잘하는 건 다음에. 어쨌든 나는 썼다. 

우리의 투쟁도 하는 게 중요하다. 계속 하는 게 중요하고, 마치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빨리 선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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