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김대건, 조선의 첫 사제 (이충렬 지음)
작년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이었다. 그는 1821년 8월 21일에 충남 당진(솔뫼)에서 출생했고, 1846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김대건은 한국인으로는 첫 사제(신부)이고, 순교한 성인이고,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큰 수호자)다. 교황 프란치스꼬께서도 "김대건은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이라고 높게 평했다. 이충렬이 지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전기(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정본 인가)"는 원래 2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서둘러 출간하는 것보다는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작가의 요청이었고, 금년 6월이 되어서야 발간되었다. 제법 두꺼운(500페이지가 넘는다) 그의 전기를 최근 다 읽었다.
*새남터는 지금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한강철교 옆 모래사장을 말한다. 근처에는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는 교회사에서도 특별한 역사성을 갖는다. 경기도 광주 퇴촌면에 "천진암"이라는 곳이 있다.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맘때면 바람 쐬러 가볼 만한 곳이다. 부지의 규모가 커서 산책할 맛이 나며 무엇보다 이 무렵의 단풍이 참 예쁘다.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방문해보기를 권한다. 천진암은 정조 재위 시절 어느 겨울, 이벽을 중심으로 권철신,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등의 청년들이 모여서 열흘간 서학(천주 교리)에 대하여 강학이라는 이름으로 토론한 곳이다. 불과 평균 20대 초반이었던 이들은 그동안의 서학을 학문적 차원에서 벗어나 천주교라는 종교적 차원으로 최초로 승화시켰다. 교황청에서 파견된 정식 신부의 포교 없이 자생적으로 천주 교리를 받아들인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훗날 강학 멤버였던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은 김대건의 가족을 지금의 당진에서 용인의 교우촌으로 인도하고, 김대건을 사제 후보로 선발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이후 천주교인들이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박해 이후 조선은 한동안 사제 없이 천주교인들이 암암리에 교우촌을 형성하고 화전을 일구며 모여사는 실정이었다. 이때,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는 세명의 조선인 사제 후보를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다. 이들이 김대건, 최양업, 그리고 최방제다. 1837년 이들 셋은 육로로 3천600킬로미터를 걸어 6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한다.
전기를 읽어보면, 김대건은 사실 세 사제 후보 중 가장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라틴어 공부는 셋 중 꼴찌였으며, 몸도 허약해 늘 복통과 두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판단력은 가장 뒤처졌고, 성품도 찬찬히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급하고 덜렁대는 편이었다. 그러나 가장 촉망받았던 최방제는 6개월 만에 열병에 걸려 죽고 이제 최양업 토마스와 김대건 안드레아만 남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향해 떠나는 데 통역을 맡아줄 조선인 사제가 필요하게 된다. 이에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에 동행할 이를 최양업과 김대건 둘 중에 골라야 할 때가 온다.
리브와 신부님, 이번 일에는 안드레아(김대건) 신학생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성격이 외향적이라 가끔 실수도 하지만 그런 성격에서 오히려 용기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메스트르 신부의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김대건의 조선 입국은 여러차레 실패하지만, 1845년 1월 1일, 마침내 조선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는 이후 대단한 임기응변을 발휘하기도 하고 누구보다도 과단성 있게 사제로서의 임무를 해낸다. 자그만한 황포돛대 배로 표류하다가 중국배를 만나서는 있지도 않은 거액을 줄테니 목적지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다. 김대건 신부 특유의 배짱과 강단이다. 김대건은 지리에도 밝아 특히 지도를 그리고 항해로나 육로를 개척하여 기록하는데 매우 능했다. 라틴어는 수준급으로 모든 편지는 라틴어로 술술 썼다. 프랑스어에도 능통해서 유럽열강들의 장교들을 만나면 프랑스어로 말을 걸어 엘리트인 척 과시함으로서 동행자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중국어도 할 줄 알아 처음 체포되었을 때는 광동성 출신의 중국인이라고 한동안 신분을 숨길 수도 있었다. 사제로서의 역할에 있어서는 공과 사를 엄히 구분하고 오직 조선에서의 사목을 개척하고자 애썼다. 그가 마카오에서 수학할 동안 그의 아버지는 참수를 당했고, 이후 한참이나 어머니를 못 보고 있던 차였다. 효심이 가득했던 김대건이지만, 조선에 입국하고 나서도 한동안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조선인 사제로서 조선대목구를 살리는 것이 더 시급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입국 후 한참이 지나 마카오로 떠난지 십 년 만에야 어머니를 만난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재회이기도 했다.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김대건 신부하면 늘 따라다니는 말이다. 그는 사목에 필요한 자금줄을 만들기 위해 백령도를 기점으로 조기잡이 배를 이용하려다가 등산 첨사 정기호에게 잡히고 만다.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을 쳐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50번이 넘는 고문과 심문에도 그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죽음을 예감한 김대건은 주교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제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10년이 지나 며칠 동안 아들을 볼 수 있었으나 다시 곧 아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부디 슬퍼하실 어머니를 위로해주십시오.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포로이며 사제인 김 안드레아. -감옥 안에서 1846년 8월 26일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길게 남기는 데, 그의 마지막 말은 바로 네글자
"잘 있거라"이다.
나는 이어령 교수가 생전 마지막 셀프 영상에서도
"여러분 잘 있으세요"라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두 분 모두 자신들이 떠나고 없을 이 세상에 대하여 마지막 남긴 한 마디가 왜 "잘 있거라" 였을까. 책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비록 자신들은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격려를 불어 넣어준 것은 아닐까? 조선의 첫 사제가 사목활동을 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불과 25세에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목이 잘려 사라져 버리는 것을 당시 교인들은 지켜봐야했다. 현세에서의 삶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다수에게 공포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신앙을 포기하거나, 반대로 누군가는 신앙에 더욱 매달렸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의 또다른 버전으로 "잘 있거라"를 김대건 신부가 남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김대건 안드레아의 삶을 영화화한 "탄생"이 11월 30일 개봉될 예정으로 있다. 위대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한 인간의 불꽃같은 생애다. 배우 윤시윤이 김대건으로 분했다. 개봉을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