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년 전 몸이 크게 아팠다. 한겨울에 입원했는데, 집에 오니 계절은 봄이 코 앞이었다. 계절의 변화를 직접 느끼고 싶었다. 아파트 단지라도 한 바퀴 돌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1층 현관으로 나갔다. 몸을 바로 세우고,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근육은 곧바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발바닥은 오래간만에 몸 전체를 지탱하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다. 몇 걸음 안 걸었는데 호흡이 엉키기 시작했다. 100미터쯤 갔을 까. 힘이 들어 도저히 계속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욱 힘겨웠다.
‘왜 안 걸어지는 거지?’
내 머리는 걷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나, 내 몸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걷기는 다분히 비 의식적인 행위이다. 걷기 자체를 의식하면서 행동으로 옮기는 이는 없다. "걸어지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자고 일어나면 자동적으로 걷게되는 호모 사피엔스의 일상이지만, 나처럼 걷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네발로 걷는 유인원들과 달리 인간은 직립보행을 한다. 직립보행을 하는 동물 자체가 희귀하다. 생각해보면 펭귄 정도인데, 펭귄의 걸음은 우스꽝스럽다. 직립보행을 함으로써 인간은 속도를 내주었다. "우사인 볼트"라 할지라도 네발짐승들의 최고 속력에는 못 미친다.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였다. 3백2십만 년 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뼈가 발견되었다. 여아였다. 그날 밤 발굴조사단 일행은 캠프에서 테이프 레코더를 통해 비틀즈의 노래를 무한반복 중이었다. 노래 제목은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과학자들은 "루시"라고 이름 지었다. 현생인류 호모(Homo)의 시작이었다. 인간의 걷기 역사는 이렇듯 장구하다. 네발 대신에 직립보행으로 인간은 무엇을 얻은 것일까. 아래 그림을 보고서 순간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생각"이다.
한 번쯤은 다들 이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다. 바티칸 궁 내부 벽화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서양철학의 거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다. 가만히 보면 이들만이 "걷고" 있다. 나머지는 다들 서 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저녁을 먹고 같은 시간에 쾨니스버그(Konisberg) 근처를 매일같이 산책하여, 그가 나오면 다들 "아하, 지금 몇 시구나"했다고 한다.
버트란드 러셀이라는 영국의 철학자는 동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을 한밤중에 찾아오고는 했다면서, "우리에 갇힌 호랑이처럼 몇 시간 동안 왔다 갔다 걸으면서 생각을 쏟아냈다."고 했다.
프랑스의 사색가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생각에 잠길 수 있다. 멈추면 동시에 나는 생각도 정지한다. 내 정신은 오직 내 다리와 함께 일한다."고 했다.
대학시절 나는 루소의 책 중에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원서로 읽었다. 한 학기 텍스트였는데, 불어 실력이 미천하다 보니, 원문 아래에 0.3 밀리 컬러 볼펜으로 깨알같이 해석을 달아 놓았다. 나중에 보니 책에 빈 공간이 없었다. 번역본 수준이었다. 사실 수업을 들으면서 루소의 말에 공감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은 말년의 루소가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사유하는 문장들로 가득차 있었다. 20대 초반의 열혈남아가 공감하기 쉽지는 않았다. '산책'보다는 '고독함'에 더 눈이 가던 시절이었고, 내 '몽상'은 '지금 수업이 끝나고 누구와 한잔 할 것인가?'였다. 한마디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걷기의 대가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길을 가고 있으니까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Wherever you go, there you are.
그래도 루소의 책에서 한 줄 정도 기억이 난다.
"명상은 내게서 피곤을 가시게 한다."였다. 기억하는 이유는 동의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아니, 걸으면서 회로 풀가동한다는데 어떻게 피곤이 가시지?' 이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를 수긍한다. 손목시계 대신에 피트니스 트래커를 착용한 지 3년이 넘었다. 나의 주된 신용카드는 K사의 '워킹 업' 카드다. 1달에 30만보를 달성하면 포인트를 2배로 쳐준다. 그래 봐야 몇만 원인데, 꾸준히 달성하는 묘한 동기부여 장치가 되고 있다. 월 30만보는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쉽지도 않다. 의식적으로 걸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걷기는 내 삶의 일부분이 된지 오래다.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잡념이 있으면 떨쳐내기도 한다. 작년부터는 제주도 올레길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올레 패스포트'를 사서 스탬프를 찍는데, 3분의 1 정도 완주했다.
이번 주말에는 중학생 아들과 함께 방문한다. 무리하지 않는다. 표선의 올레 4코스를 완주할 생각이다.
걷기 좋은 계절이다. 내 두 발로 지구를 누르면서 내는 낙엽의 바스락거림은 살아있음의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