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부라진 다짐

by 아녜스

여름이 간 건 분명하다. 가을인 듯 아닌 듯해도,

바람의 손길이 금세 선선해졌다.

일상의 작은 일에 희비의 쌍곡선이 넘나 든다.

때때로 즐겁고, 단순하고, 가볍다.

들여다보면 일상은 복잡한 구조가 아니다.

해가 뜰 때 다짐을 늘어놓다가 해가 질 때 다짐들은 짜부라져 있기도 하다.

짜부라진 다짐이란 게 대게는 내 머릿속에 저장된 하루 일과표 같은 거라서 엄격하게 내몰지 않아도 된다. 가령,

오늘은 기필코 이불 빨래를 할 것 아니면 목욕탕 대청소, 여름옷 정리하고 가을 옷 꺼내기 등등 소소한 일이지만 설렁설렁 넘길 일도 아닌 그런 류이다. 또 그날 실행을 못 한다 한들 대세에 지장이 없기에 상황 변동 시 즉각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들이다. 애면글면 안달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짐과는 별개로 아예 접어두는 일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

시골에 집짓기, 영어 공부하기, 여행 드로잉, 시니어 해외 봉사활동 등등. 희망사항이 절대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미뤄둔 숙제 같은 거다.

생각난 김에 이 중에 뭔가를 실행해야 될 의무감이 들었다. 영어공부다.

이번 겨울에는 아들을 보러 미국에 가야 하는데 입도 뻥긋 못하는 억울함은 면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너무나 오랜만에 영어단어들이 눈앞에서 날아다닌다. 기본 인사 말고는 토막토막 입안에서 오물거릴 뿐 도통 이어지지 않는다.

에고, 이를 워째~! 그동안 해외여행 다닌다고 길에다 뿌린 돈이 얼만데! 안 되겠니? 몸만 따라다닌 티가 절로 난다. 나날이 협소해지는 머릿속을 원망할 수도 없고, 방법은 집중력이다.

긴 호흡으로 머리 쓰는 일은 바로 한계점으로 치닫는 맹점이 있지만, 나의 집중력은 예전에도 데드라인이 있을 때만 속도전처럼 후다닥 타올랐다가, 끝나면 바로 꼴까닥 꺾어지는 고질병 같은 것이다. 그래도 믿을 구석이라곤 이것밖에 없다. 앞으로 두어 달은 다짐 목록에 올려둘게 하나 더 늘었다.


'연령이 증가할수록 뇌 혈류량이 떨어져 뇌 기능이 전반적으로 약해지고, 수행 능력이 감소하긴 하지만, 연령이 높다고 반드시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기부여가 확실하다면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이 말에 위안을 얻으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이전 07화뻔뻔해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