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그리기 보다 쓰기

연재 시작합니다

by 한요고

어렸을 때 만화가가 꿈이었다.

만화책을 볼 때 다음 장면을 아껴 보느라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고.

다 보고 나서, 좋아하는 장면으로 돌아가 그림의 선을 음미했다.

머릿결, 옷자락, 눈동자와 속눈썹, 대사 하나까지 모조리 외우며 빠져들었다.

빈 종이만 보이면

우수에 찬 큰 눈동자를 가진 주인공이나

치마가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를 정성껏 그렸다.

그림을 본 친구들은 잘 그렸다고 호들갑스럽게 칭찬해 줬다.

으쓱해진 나는 부끄러워하면서 킥킥 웃곤 했다.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끄적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한 적도 없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고 장난 삼아 그리던 일은 그만두었다.

만화가는 한 때의 ''이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책을 읽다가 글 한 줄에 뭉클해져 가만히 창 밖만 보고 있을 때나

퇴근하다 본, 서쪽 하늘 노을이 기가 막히게 예쁜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때,

사람과 일에 치여 욕이 절로 나와도 꾹 삼키고 표정관리 해야 할 때,

매일 열심히 살고 있는데 아무도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을 때.


지나고 나면 아무 흔적 없이

시간 속에 묻히고 마는 순간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감각하는 모든 것이 모여 일상이 되고

일상이 모여 삶을 이루는 데,

그것들을 놓치고 지나치기 아깝다.


창고에 쌓인 재고처럼 내 안에 이야기가 잔뜩이었다.

어느 날, '쓰자' 하고 자세를 잡았다.

어렸을 때 만화를 그릴 때처럼 쓰기만 하면 술술 써질 줄 알았다.

머릿속 기억, 생각을 글로 변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배움을 시작해야 하나. 막막했다.

작법서를 찾아보고 글쓰기 책을 읽고,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해도

책은 책이고, 나는 나였다.

이상적인 글과 내 글을 기찻길처럼 평행을 달렸다.


문득 그냥 이대로 써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이에 여백만 보이면 '미스터 블랙'을 그렸던 그때의 설렘이라면,

잊혔던 만화가의 꿈을 슬그머니 꺼낸다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이야기를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작아서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 것들과 감정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쓰면서 생각해 보겠노라.' 용기 있게 대답하고 싶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