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무관한 고백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 쉬울 때가 있어요

by 한요고

타인은 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가끔 삶과 무관한 사람에게 안전한 고백을 하기도 한다.


정년이 되어 퇴직하는 직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다.

처음 직장에 들어갔을 때 실수투성이인 나를 도와준 선배이자 동료였다.

그녀가 있는 사무실에 들어가자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맞아 주었다.

단발머리에 밝은 피부, 헬스로 만들어진 군살 없는 체형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우리는 사무실 한쪽에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퇴직하니 기분이 어떠세요?” 했더니,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출근하기 지겨웠어, 빨리 들어가고 싶어.” 했다.

“사람들 인사받는 것도 지겨워.” 그 말에, 나는 인사하러 와서 미안하다며 웃었다.

“이제 뭐 하고 지내실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딸이 수원에 작은 카페를 오픈한다며 가서 도울 거라고 했다.

“어? 혹시 사장님이 되신 거예요?”

나는 넘겨짚어 말했다.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그냥 조금 보태 준 거야. 딸이 커피를 잘 만들거든.” 하셨다.

"정말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핸드폰을 열고 사진을 보여줬다.

흰 벽과 천장, 검은 레일조명이 달린 아담한 카페 사진이었다.

커피 머신 앞에, 그녀의 딸로 보이는, 여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와, 축하드려요." 했더니,

“아직 인테리어 더해야 돼, 아무도 모르는 얘기니까 혼자만 알고 있어.”


잠깐 침묵이 지나고,

“자기는 어떻게 할 거야?” 내게 물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물음의 의미를 생각했다.

출근쟁이가 출근 말고 '어떻게'라는 선택지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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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근무를 시작할 때 그녀를 만났다.

나는 늦은 나이에 직장에 들어가 마치 처음인 양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적응하려고 일찍 출근하고 메모도 열심히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문서에 띄어쓰기 잘못했다가 내용 확인 안 하냐며 팀장님께 혼나거나,

결제 금액에 0을 하나 더 붙였다가 취소하느라 진땀 뺐고,

팀장님과 과장님이 지시한 내용이 달라서 갈팡질팡 했다.

그녀는 내가 수습하도록 도와주고, 같이 욕해주고, ‘실수할 수도 있지.’라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나면 이곳이 낯설어 보였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이면지에 채찍 같은 선을 죽죽 긋고 있으면

그녀는 자신의 서랍에서 귤이나 땅콩 같은 간식거리를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인사이동으로 다른 부서에 가서도 여전히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물음에 줄을 그었다.

답을 내지 못하는 질문들이 늘어가면서 시간이 지났다. 그녀가 퇴직하는 날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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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글 쓸 거예요.” 얼떨결에 말해버렸다. 내가 했던 물음들에 답을 찾고 싶었다.

“오, 그래? 자기하고 어울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러고는, 어디에 쓸 거냐고, 지금 쓰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은….이라고 얼버무렸다.

누구에게 글을 쓰겠다고 말해 본 것이 처음이었다. 괜히 말했나 싶기도 했다.

“잘 됐다. 글 써서 상도 타고, 책도 쓰고, 그러면 좋겠다. 그치?”

그녀는 재밌다는 듯, 신나서 카페 얘기할 때와 다르게 목소리가 세배는 커졌다.

“네? 그건 좀…. 너무 먼 얘기 같은데요?” 당황했다.

“그런가?”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한참 동안 소리 내 웃었다, 직원 몇이 우리 쪽을 힐끔 거렸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내일부터 출근 안 하는데 내가 누구한테 말해?” 해서 한 번 더 웃었다.


우리는 몇 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퇴근과 함께 서로의 삶에서 퇴장하는 사이였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끼어들지 않고 각자의 차선을 달리며 가끔 안부를 묻는 사람.

간격을 유지하며 서로를 들여다보는 타인이었다.

마지막일지 몰라, 섭섭해서 눈물 나면 어쩌나 했는데,

카페 사장님과 글 쓴다는 고백을 서로에게 던져 놓고 편안하게 웃게 될 줄 몰랐다.

갑작스러운 상대의 고백에 어떤 의견도, 충고도, 비판도 달지 않는 삶의 무관함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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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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